빨치산 자료집 ⑦ 산에서 쓴 편지 — 끝내 전달되지 못한 7장

1951 10월 25일 · 일월산(경북 영양·봉화)

원문

리승엽 선생님 앞 조국해방전쟁의 승리의 행정 속에서 존귀하신 선생님의 기체 만안하심을 멀리서 축복하옵나이다. (…) 별지 보고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저희들 부대는 1950년 7월 15일 그 주력 130명이 운문산에 도착 이후, 경북 남부지구 및 경남 동부지구를 통한 동일 전구를 형성하면서 지방당 단체 사업들을 지도·협력하였습니다. (…) 저희들 아직 당성이 미약하여 (…) 도당 및 중앙당 연결을 위하여 중요한 이 지구의 사업에 적지 않은 약화를 예상하면서 출발하였음을 선생님 앞에 자기비판하면서, 이에 대하여 엄격한 비판을 바라는 바입니다. (…) 금번 파견하옵는 참모장 김정수 동무는 모든 실정을 옳게 반영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후속병력을 예기하면서 보내는 바입니다. 1951. 10. 25 안병렬

『빨치산 자료집』 1권 문건편(1), 인쇄 477~485쪽(PDF 497~505쪽). 펜으로 눌러 쓴 7장짜리 세로쓰기 편지이며 봉투도 함께 남았다. 첫 장 좌측 상단에 미군 문서번호 206506, 하단에 500th MI Svc Gp DOC 206506이 찍혀 있다. 위 인용은 임경석(성균관대)의 판독을 따랐고, 원문 전체가 아니라 요지가 드러나는 대목만 발췌해 (…)로 이었다. 원본 스캔은 아래 첨부에서 볼 수 있다.

현대어로 읽기

동해남부전구 빨치산부대 정치위원 안병렬이 1951년 10월 25일 일월산에서, 남한 빨치산 사업을 총괄하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이승엽에게 보낸 공식 보고서 겸 건의서다. 부대는 1950년 6월 24일 속초항에서 배로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7월 15일 운문산에 도착했을 때 주력은 130명이었다. 편지는 부대 현황을 보고하고, 지휘권 분쟁의 처리를 자기비판하며, 후속 병력과 폭약·특수장비의 보급을 요청하고, 그 실정을 직접 전하기 위해 참모장 김정수를 북으로 보낸다고 알린다.

왜 이 문장인가

이 편지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첫째, 산의 부대가 얼마나 고립돼 있었는가. 남도부 부대의 전투구역인 경남 동부는 전쟁 내내 인민군에게 점령된 적이 없는 "적진 한가운데"였고, 이 부대는 남파 이후 한 번도 중앙당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보고도 지령도 보급도 없었다. 1950년 하반기에만 연락대를 세 번 북상시켰지만 모두 실패했다. 지도부가 병력의 3분의 1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따라 일월산까지 올라간 것은 그 봉쇄를 뚫기 위해서였다. 둘째,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였는가. 안병렬은 충남 당진 오곡리의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경성제2고보를 나와 홋카이도제국대학 농학부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학자였다. 1940년 동아일보에 자기 고향 농민의 생활과 아동 건강 상태를 조사한 글을 11회 연재했고, 해방 후에는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와 민주주의민족전선 토지문제연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토지개혁안을 입안했다. 서른 살에 조선 농업문제 일급 전문가로 꼽히던 사람이 1948년 월북해 1950년 6월 총을 들고 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 편지는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편지를 지니고 북상하던 참모장 김정수는 38선 연선에서 국군에게 사살된 것으로 전한다. 문서에 붙은 「적서약력표」에는 1952년 1월 13일 20연대 전방지점에서 "발굴"했다고 적혀 있다 — 사살된 시신이나 비밀 아지트에서 노획했다는 뜻의 군 정보기관 용어다. 봉투까지 함께 노획된 것으로 보아 사본이 아니라 실물이었고, 곧 이승엽은 이 글을 읽지 못했다. 편지의 주인공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52년 1~2월 일월산지구 토벌로 제4지구당 주력이 궤멸했고 도당 위원장 박종근도 2월 17일 사살됐다. 안병렬은 그 뒤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 편지가 그의 생애 마지막 기록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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