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년에 태어났다. 열두 살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가 배웅하며 말했다. 십 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마라.
그는 육 년 만에 빈공과에 급제했다.
당에서 이름을 얻다
당에서 벼슬을 살던 중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그가 지은 「토황소격문」은 반란군을 성토하는 글인데, 그 글을 읽던 황소가 놀라 자리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큼 문장이 알려졌다는 뜻이다.
스물여덟에 신라로 돌아왔다. 당에서 쌓은 이름과 경험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나라는 그를 쓰지 못했다
신라는 골품제의 나라였다. 그는 육두품이었다. 아무리 뛰어나도 오를 수 있는 자리에 한계가 있었다.
중앙에서 밀려나 지방 태수를 전전했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십여 조를 올렸다. 나라를 고치기 위한 방책이었다. 왕이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 무렵 신라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세금이 걷히지 않았고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났으며 견훤과 궁예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사라지다
그 뒤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여러 곳을 떠돌다 가야산 해인사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언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고려사에는 그가 고려 태조에게 글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그가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전승이 널리 퍼졌다. 아침에 나갔다가 숲에 갓과 신을 벗어두고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는 이야기다.
지리산, 가야산, 마산 월영대, 부산 해운대 등 전국 여러 곳에 그가 머물렀다는 자리와 그가 썼다는 글씨가 남아 있다. 해운대라는 지명 자체가 그의 호 해운(海雲)에서 왔다.
한 사람이 이렇게 여러 곳에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실제로 많이 다녔다는 뜻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를 여기저기에 두고 싶어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은 것
그의 문집 『계원필경』이 전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문집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불교와 도교에 두루 밝았다. 「난랑비 서문」에서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현묘한 도가 있으며 그것이 유교 불교 도교를 아우른다고 적었다. 화랑에 대해 남은 가장 중요한 기록 가운데 하나가 이 짧은 글이다.
당에서는 외국인이었고 신라에서는 육두품이었다.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산으로 들어가 사라졌고,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