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간섭이 시작되자 고려에 갑자기 귀해진 것이 하나 있었다. 몽골어를 하는 사람이다. 왕이 원에 가서 황제를 만나고, 몽골 사신이 개경에 와서 명령을 전하고, 공주가 왕비로 오는데 —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었다. 조정은 똑똑한 아이들을 골라 몽골어를 가르쳤다. 그 아이들 중에 조인규가 있었다.
그는 평양 근처의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다. 고려의 문벌 사회에서 그런 집안이 오를 수 있는 자리는 뻔했다. 그런데 몽골어가 사다리가 됐다. 통역으로 왕을 따라 원에 드나들면서 그는 왕의 눈에 들었고, 원 조정에도 얼굴이 알려졌다. 왕이 몽골 공주와 결혼한 뒤로는 왕과 왕비 사이의 말까지 그가 옮겼다. 왕실의 가장 안쪽에서 통역하는 사람 — 그 자리가 얼마나 큰 권력인지 그도 알았고 남들도 알았다.
조인규는 재상이 됐다. 역관 출신이 고려 최고위 관직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딸을 세자, 훗날의 충선왕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통역관의 딸이 왕세자의 아내가 됐다. 문벌이 전부이던 나라에서 말 한 가지로 여기까지 올라온 셈이다.
그 한 걸음이 그를 무너뜨렸다. 충선왕에게는 몽골 공주 출신의 정비가 따로 있었다. 왕이 조씨를 더 아낀다는 소문이 돌자 공주 쪽에서 원에 글을 보냈다. 조씨가 공주를 저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주가 사실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몽골 공주가 원에 보낸 고발과 고려 역관의 딸이 하는 변명 중 어느 쪽이 통할지는 뻔했다. 조인규는 아내와 함께 원으로 압송돼 고문당했고, 딸은 옥에 갇혔으며, 사위인 왕은 즉위 일곱 달 만에 폐위됐다. 조인규는 서쪽 변방으로 유배됐다.
몇 해 뒤 풀려나 고려로 돌아왔고, 충선왕이 복위하자 명예도 회복됐다. 일흔둘에 세상을 떠났고 자손들은 고려 말의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결말만 보면 이 시리즈에서 좋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그가 올라간 길과 떨어진 길이 같은 길이었다는 점은 다른 인물들과 다르지 않다. 그를 올린 것은 원의 힘이었고, 그를 떨어뜨린 것도 원의 힘이었다. 몽골어는 그에게 사다리였지만, 사다리는 딛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놓아 준 사람의 것이었다.
이 시리즈의 다른 인물들이 국경을 넘었다면, 조인규는 국경을 넘지 않고 국경이 자기 나라 안으로 들어온 시대를 산 사람이다. 말이 곧 경계였고, 그 경계를 오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충선왕 편과 나란히 읽으면 같은 사건이 두 사람에게 어떻게 다르게 닥쳤는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