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모중 — 황제의 그림자가 된 고구려 유민

710 · 당 장안

고구려가 무너진 뒤, 당은 수십만 명의 고구려 사람들을 제국 곳곳으로 흩어 옮겼다. 그렇게 흩어진 유민의 후손 가운데 한 소년이 있었다. 집이 몰락해 남의 집 종이 된 처지였는데, 그가 들어간 집이 하필 임치왕 이융기의 집이었다. 훗날의 당 현종이다.

왕모중은 힘이 세고 말을 잘 다뤘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인 곁에 있었다. 710년, 이융기가 위황후 일파를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을 때 왕모중은 금군의 문을 여는 데 공을 세웠고, 3년 뒤 태평공주 세력을 칠 때도 앞장섰다. 두 번의 정변으로 이융기는 황제가 됐고, 종이던 왕모중은 대장군이 됐다.

현종의 신임은 유별났다. 왕모중에게 황궁 경비와 황실의 말 목장을 통째로 맡겼는데, 그가 관리한 말이 수만 필로 불어나자 현종이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벼슬은 개부의동삼사 — 신하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까지 갔다. 노비 출신 이민족 유민으로서는 사실상 천장을 뚫은 것이다.

그런데 천장을 뚫은 다음이 문제였다. 왕모중은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하기 시작했다. 대신들 앞에서 거만하게 굴었고, 무기고를 관리하는 관리에게 병기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황궁 경비 사령관이 사사로이 무기를 청한 것이다. 그 관리가 이를 조정에 알렸고, 재상들은 오래전부터 하던 경고를 반복했다. 금군을 한 사람에게 너무 오래 맡겨 두셨습니다.

731년, 현종은 왕모중의 벼슬을 거두고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길 위에서 사약이 그를 따라잡았다. 아들들도 함께 죽거나 유배됐다. 이십 년을 함께한 황제는 끝내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왕모중의 이야기는 흑치상지와 닮았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흑치상지는 모함으로 죽었고, 왕모중은 스스로 선을 넘다 죽었다. 그러나 두 죽음의 바탕은 같다. 제국은 이방인의 능력을 샀지, 이방인을 산 것이 아니었다. 능력이 필요 없어지거나 부담스러워지는 순간, 이방인은 언제든 지울 수 있는 존재였다.

출세의 사다리는 분명 바깥에 있었다. 다만 그 사다리는 오르라고 놓아 준 것이지, 꼭대기에 머물라고 놓아 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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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계를 넘은 사람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