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 파미르를 넘은 고구려 유민의 아들

747 · 탈라스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타라즈)

아버지 고사계는 고구려가 망한 뒤 당의 서쪽 변방으로 흘러들어 군인이 된 유민이었다. 아들은 그 변방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부대에서 자랐다. 스무 살에 장군이 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고선지는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그를 역사에 새긴 것은 747년의 원정이다. 당시 토번이 파미르 고원 너머의 소발률국(지금의 파키스탄 길기트 일대)을 손에 넣으면서 실크로드 남쪽 길이 막혔다. 당 조정은 몇 차례 원정을 보냈지만 모두 실패했다. 문제는 적이 아니라 길이었다.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고원과 빙하를 군대가 통째로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선지는 1만 병력을 이끌고 그 길을 넘었다. 부대를 셋으로 나눠 서로 다른 길로 보낸 뒤 정해진 날짜에 적의 요새 앞에서 합류시키는, 시계도 통신도 없는 시대에 상상하기 어려운 작전을 성공시켰고, 요새를 함락시킨 뒤에는 다시 빙하 고개를 넘어 소발률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훗날 이 일대를 답사한 영국의 탐험가 오렐 스타인은 이 원정을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에 견주었다 — 그리고 넘은 산의 높이로는 고선지 쪽이 위라고 적었다.

이 원정으로 고선지는 안서사진절도사, 그러니까 당 제국의 서쪽 국경 전체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다. 서역의 나라들이 그의 이름을 알았고, 아랍 쪽 기록에는 그가 중국 산맥의 왕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구려 유민의 아들이 실크로드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정점 다음의 일들은 그의 명성에 그늘을 드리운다. 750년 석국(지금의 타슈켄트)을 정벌하면서 항복한 왕을 장안으로 보내 처형당하게 했는데, 이 일이 서역 나라들의 민심을 돌려세웠다. 탈출한 석국 왕자가 아바스 왕조에 도움을 청했고, 751년 탈라스 강가에서 고선지의 당군과 이슬람 제국의 군대가 맞붙었다. 세계사에서 중국과 이슬람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드문 장면이다. 닷새간의 접전 끝에 동맹군이던 카를루크가 등을 돌리면서 당군은 무너졌고, 고선지는 살아남은 병력을 수습해 퇴각했다.

덧붙여 둘 것이 있다. 이 전투에서 잡힌 당군 포로들을 통해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로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는 그 전부터 중앙아시아에 종이가 퍼져 있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극적인 이야기일수록 한 번 의심해 보는 것이 이 시리즈의 원칙이라, 논쟁이 있다는 것까지 적어 둔다.

그의 끝은 탈라스가 아니었다. 755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선지는 급조된 군대로 수도의 길목인 동관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다. 그는 상황을 보고 방어선을 뒤로 물렸는데, 이 판단이 황명 없는 퇴각으로 몰렸다. 평소 그와 사이가 나빴던 환관이 군량을 빼돌렸다는 혐의까지 얹어 보고했고, 현종은 진중에서 그를 참수하라 명했다. 처형대에 선 고선지가 병사들을 향해 물었다. 내가 군량에 손을 댔다면 그렇다고 말하라. 병사들이 억울하다고 외치는 소리가 진영을 울렸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 소리 속에서 그는 목이 잘렸다.

제국은 그의 능력으로 국경을 넓혔고, 위기가 오자 가장 먼저 그를 버렸다. 어디서 많이 본 순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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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계를 넘은 사람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