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여름, 백제가 무너졌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이 항복하던 그때, 서른 살쯤 된 서부 출신 장수 하나가 부하들을 이끌고 임존성으로 들어갔다. 예산의 봉수산, 지금도 성벽이 남아 있는 그 산성이다. 열흘 만에 3만 명이 모여들었다.
흑치상지. 성이 흑치(黑齒), 검은 이라는 뜻이다. 1929년 중국 뤄양의 북망산에서 그의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이 낯선 성의 내력이 밝혀졌다. 본래 왕족인 부여씨였는데 조상이 흑치 지역에 봉해지면서 그 땅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흑치가 어디인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지만, 어쨌든 그는 백제 지배층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이다.
임존성의 흑치상지는 강했다. 소정방이 직접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고, 백제부흥운동의 첫 승리가 이 성에서 나왔다. 이후 3년 동안 그는 부흥군의 맹장으로 나당연합군과 싸운다.
그런데 부흥운동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무너졌다. 지도부가 서로를 죽였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였다. 백강 전투에서 왜군까지 전멸하자 대세는 끝났다. 이 무렵 흑치상지는 당에 투항한다. 그리고 당군의 앞에 서서, 자신이 지키던 임존성을 함락시켰다.
이 대목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적어 둘 필요가 있다. 그에게는 돌아갈 나라가 이미 없었다. 부흥운동 내부의 살육을 눈앞에서 본 사람에게, 남은 선택지가 무엇이었을지도.
당은 그를 크게 썼다. 토번(지금의 티베트)이 당의 서쪽을 위협하던 시절, 흑치상지는 하원군 경략대사가 되어 그 전선을 맡았다. 야습으로 토번군을 무너뜨리고, 둔전을 일궈 군량을 자급하게 만들고, 7년 동안 그 전선을 지켰다. 이어 북쪽에서는 돌궐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했다. 구당서와 신당서가 모두 그를 명장으로 기록한다. 망한 나라의 장수가 세계 제국의 국경 두 곳을 지킨 것이다.
끝은 전장이 아니라 감옥에서 왔다. 측천무후의 공포정치가 한창이던 689년, 혹리 주흥이 그를 모반 사건에 엮었다. 증거는 없었다. 흑치상지는 옥중에서 목을 매 생을 마쳤다. 예순 살이었다. 몇 년 뒤 아들 흑치준의 노력으로 명예는 회복됐지만,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묘지명은 그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해 놓았다. 백제에서 태어나 당에서 죽었고, 두 나라 모두를 위해 싸웠다고. 다만 순서가 있었다 — 조국이 먼저 사라졌고, 제국이 그다음에 그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