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 — 무덤의 돌이 사서를 고친 사람

689 10월 · 임존성 · 낙양

백제 사람 가운데 생애가 가장 자세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 자세함이 우리 사서에서 온 것이 아니다.

1929년, 중국 낙양 망산에서 무덤 하나가 발굴됐다. 그 안에서 묘지명이 나왔다. 백제 사람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것이었다. 이듬해에는 그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도 나왔다.

돌에 새겨진 것

묘지명은 그의 집안 내력부터 적었다. 흑치씨는 원래 백제 왕성인 부여씨에서 갈라져 나왔고, 흑치라는 곳을 봉지로 받아 그것을 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가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어떤 벼슬을 지냈고 어떤 전투에 나갔는지가 연도와 함께 적혀 있다. 삼국사기가 백제 인물에게 이만큼 지면을 준 경우는 없다.

세 번의 인생

첫 번째는 백제의 장수다. 그는 서부 지역을 관할하는 달솔이었다. 660년 백제가 무너지자 임존성으로 들어가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열흘 만에 3만이 모였다고 기록됐다. 소정방이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백제의 200여 성이 그에게 호응했다.

두 번째는 당의 장수다. 663년, 그는 당에 항복했다. 그리고 당군의 길잡이가 되어 자신이 지키던 임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부흥운동은 그것으로 끝났다.

당으로 건너간 뒤 그는 최고위 무장이 되었다. 토번과 돌궐을 상대로 여러 차례 이겼고, 연국공에 봉해졌다. 당 조정에서 그만큼 오른 이민족 출신 장수는 많지 않다.

세 번째는 죄인이다. 689년, 주흥 등의 무고로 반역 혐의를 받고 옥에 갇혔다. 그리고 옥중에서 목을 매 죽었다. 예순이었다. 뒷날 무고임이 밝혀져 명예가 회복되고 아들이 벼슬을 이었다.

왜 항복했나

이 질문에 답한 자료는 없다. 묘지명은 당에서 만든 것이니 그 대목을 그의 결단으로 미화해 적었다.

짐작해볼 만한 사정은 있다. 663년은 부흥운동의 지도부가 서로를 죽인 해다. 복신이 도침을 죽였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였다. 백강에서 왜의 지원군이 궤멸했다. 안에서 무너진 뒤였다.

다만 그가 임존성을 직접 공격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당 조정 안에서도 이 일을 두고 말이 있었다고 전한다.

무엇을 배우게 되나

한국사에서 백제 사람의 생애를 이만큼 자세히 아는 경우는 이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가 당의 신하로 죽어 당의 방식으로 묻혔기 때문이다.

임존성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면 그의 이름은 부흥운동 기록의 한 줄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남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끝났는가일 때가 있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고대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