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대첩 루트
좁은 물목에서 넓은 바다로 — 적을 원하는 자리로 데려온 뒤에야 날개를 펼쳤다
타임라인 (12개 지점)
- 히데요시의 계획 — 바다로 올라가 만나자 (1592 6월 · 부산포)
개전 두 달 만에 한성이 떨어지고 선조는 북으로 달아났다. 육지에서 일본군은 파죽지세였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구상에는 바다가 있었다. 육군이 북상하는 동안 수군이 남해와 서해를 돌아 물자와 병력을 실어 올려 평양에서 합류한다 — 수륙병진이다. 대군이 조선 땅 끝까지 올라가려면 육로 보급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 바닷길의 길목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있었다.
- 연합함대 출항 — 세 수사가 모이다 (1592 7월 6일 · 노량 앞바다)
7월 6일,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가 출항해 노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과 합류했다. 판옥선 55척 규모의 연합함대였다. 이미 옥포·사천·당포에서 이겨본 뒤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흩어진 적을 각개로 친 것이었다. 이번에 상대할 것은 집결한 주력이었다.
- 목동 김천손 — 견내량에 왜선 70여 척 (1592 7월 7일 · 당포(통영 산양))
7월 7일 저녁 당포에 정박했을 때, 산에서 내려온 목동 김천손이 알려왔다.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와 정박해 있다는 것이었다. 이름이 남은 목동이다. 전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이 대목이 말해준다 — 이순신이 이긴 전투에는 늘 그가 먼저 알았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는 이 바다를 아는 사람들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 견내량 — 여기서는 싸울 수 없다 (1592 7월 8일 · 견내량(거제-통영 수로))
이순신은 견내량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곳은 폭이 좁고 암초가 많은 물목이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은 크고 튼튼했지만 좁은 데서는 그 장점을 쓸 수 없었다. 배를 돌릴 자리가 없으면 총통을 쏠 방향을 잡을 수 없고, 적이 배에 올라타 칼로 싸우는 방식으로 끌고 들어가면 오히려 불리했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적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달아난다. 그러면 이번에는 육지의 백성이 당한다. 이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옮겨야 한다. 문제는 적이 따라 나와 주느냐였다.
- 유인 — 지는 척하며 물러나다 (1592 7월 8일 · 견내량 남쪽 출구)
판옥선 대여섯 척이 견내량으로 들어가 적의 선봉을 건드렸다. 그리고 곧 물러섰다. 일본 함대가 쫓아 나왔다. 지휘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에서 조선 관군을 크게 이긴 직후였다. 이기고 있는 쪽은 추격을 의심하지 않는다. 살수에서 하루에 일곱 번 지고, 귀주에서 개경 앞 들판을 비운 것과 같은 수다. 물러서는 것이 곧 데려가는 것이다.
- 한산도 앞바다 — 날개를 펴다 (1592 7월 8일 · 한산도 북쪽 해역)
넓은 바다에 이르자 물러나던 함대가 갑자기 뱃머리를 돌렸다. 좌우로 벌어지며 반원을 그렸다. 학익진이다. 흔히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만 설명되지만, 대형 자체가 무기는 아니다. 이 대형이 하는 일은 흩어져 있던 여러 배의 화력을 한 점으로 모으는 것이다. 쫓아 들어온 일본 함대는 반원의 안쪽, 모든 총통이 겨누는 초점에 들어와 있었다.
- 두 가지 싸움법이 부딪치다 (1592 7월 8일 · 한산도 앞바다)
일본 수군의 싸움법은 배를 붙여 건너가 칼로 결판내는 것이었다(등선육박). 육상 전투를 바다 위에서 하는 방식이며, 백병전에 능한 그들에게 유리했다. 조선 수군은 달랐다. 지자총통·현자총통을 쏘아 배 자체를 부쉈다. 붙기 전에 끝내는 방식이다. 판옥선은 배 밑이 평평해 제자리에서 회전할 수 있었고, 그래서 한쪽 포를 쏜 뒤 돌려 다른 쪽 포를 쏠 수 있었다. 학익진은 이 화력 방식 위에서만 성립하는 전술이었다. 대형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싸우는 방식이 대형을 만들었다.
- 59척 — 장계에 적힌 숫자 (1592 7월 8일 · 한산도 앞바다)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 따르면 적선 73척 가운데 59척을 격침하거나 사로잡았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남은 배로 빠져나갔고, 뭍으로 달아난 병사들은 한산도에 며칠 갇혀 있다가 겨우 탈출했다. 조선 수군의 손실은 크지 않았다. 배를 한 척도 잃지 않았다고 장계는 적었다. 다만 전과의 수치는 조선 측 기록이며 일본 측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확실한 것은 이 해전 이후 일본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되찾지 못했다는 결과다.
- 안골포 — 이틀 뒤, 남은 함대까지 (1592 7월 10일 · 안골포(창원 진해))
이틀 뒤 조선 함대는 안골포에 정박해 있던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의 함대를 쳤다. 이들은 견내량의 소식을 듣고 나오지 않으려 했으나, 조선 수군이 들어가 종일 공격했다. 한산도와 안골포를 묶어야 이 작전이 완성된다. 주력을 깨고 예비대까지 무력화한 것이다.
- 히데요시의 명령 —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마라 (1592 7월 · 나고야성(일본))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 해전을 피하고 거점을 지키라는 취지의 명령을 내렸다. 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맞붙지 말라는 것이었다. 수륙병진은 이로써 무너졌다. 평양까지 올라간 일본군은 보급이 오지 않는 상태로 남겨졌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전라도가 지켜졌다. 조선에서 가장 넓은 곡창이 온전했다는 것은, 이 나라가 앞으로 6년을 더 버틸 밥이 있었다는 뜻이다.
- 한산도 통제영 — 이긴 바다에 자리를 잡다 (1593 7월 · 한산도 제승당)
이듬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통제영을 한산도에 두었다. 이긴 자리에 눌러앉은 것이다. 견내량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그는 4년 가까이 바다를 막았다. 둔전을 일구고 소금을 굽고 배를 만들었다. 싸우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1595 8월 15일 · 한산도 수루)
그가 이 섬에서 남긴 것은 승첩 장계만이 아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긴 사람의 노래가 아니다. 이기고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의 노래다. 그는 7년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고, 한시와 시조를 남겼으며, 조정에 올린 장계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문서 문학으로 읽힌다. 을지문덕은 넉 줄의 한시를 남겼고, 강감찬은 과거에 장원한 문관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문반 가문에서 태어나 현감을 지낸 뒤 바다로 갔다. 세 번의 대첩을 이끈 세 사람이 모두 글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