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의 「아리랑」 단성사 개봉 — 100주년
스물넷의 나운규가 만든 무성영화가 종로 단성사에 걸렸다. 검열을 피하려고 감독란에는 일본인 이름을 올리고 자신은 원작·각색 자리에 호만 적었다. 영화는 2년 넘게 걸렸고, 원본 필름은 지금도 행방을 모른다. 개봉일을 10월 3일로 적은 자료도 있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10월은 나라의 이름과 헌법이 여러 번 바뀐 달이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가 되어 대한제국을 열었고,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1987년 10월 29일 지금의 헌법이 나왔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됐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총을 쏘았다. 70년 뒤 같은 날 궁정동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 나운규의 「아리랑」 개봉 100주년이다.
스물넷의 나운규가 만든 무성영화가 종로 단성사에 걸렸다. 검열을 피하려고 감독란에는 일본인 이름을 올리고 자신은 원작·각색 자리에 호만 적었다. 영화는 2년 넘게 걸렸고, 원본 필름은 지금도 행방을 모른다. 개봉일을 10월 3일로 적은 자료도 있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10년 공사 끝에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선 총독부 청사가 문을 열었다. 날짜는 일부러 10월 1일로 맞췄다. 1910년 이날 총독부 관제가 시행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되어, 일제가 「시정기념일」로 부르던 날이다. 같은 날 종로에서는 「아리랑」이 걸렸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해방 이듬해 굶주린 대구에서 쌀을 달라는 시위가 대구부청 앞에서 벌어졌고 경찰이 총을 쏘아 노동자 두 사람이 숨졌다. 이튿날 만여 명이 경찰서를 에워쌌고 미군정은 계엄령을 내렸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함흥의 한 여학생 일기에서 시작된 수사가 사전을 만들던 사람들에게 닿았다. 이날 이극로·최현배 등 11명이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됐다.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숨졌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국군 3사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넘었다. 이날을 기려 1956년 국군의 날이 제정됐고 올해로 제1회 기념식 70주년이다.
마적 떼가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했다. 일본은 이를 조선 독립군의 소행으로 몰아 간도에 군대를 보냈고, 그 뒤 청산리 전투와 간도참변이 이어진다. 마적을 사주한 것이 일본 쪽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여당 공화당 안에서 반란표가 나와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이 가결됐다. 박정희는 주동 의원들을 중앙정보부로 끌고 가 고문했다. 1년 뒤 유신이 온다.
16일간의 서울올림픽이 잠실에서 막을 내렸다. 동서 두 진영이 12년 만에 한 경기장에 모인 대회였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가던 노무현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 이틀 뒤 10·4 선언이 나온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본래 음력 10월 3일에 지키던 개천절을 1949년 국경일 법을 만들며 양력 10월 3일로 옮겼다.
해방 뒤에도 쓰이던 일본 형법을 대신해 우리 손으로 만든 첫 형법전이 시행됐다.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제철 공업단지의 첫 삽을 떴다. 회사 창립과 제철소 기공은 이듬해 이어진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짙은 안개 속에서 서해대교 위 차량 29대가 연쇄 충돌했다. 사망자는 11명과 12명으로 자료가 엇갈린다.
단성사에서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개봉했다. 녹음은 이필우가 맡았다. 화면 속 배우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날이다.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문제 삼아 여당이 단독으로 야당 총재를 국회에서 쫓아냈다. 그의 정치적 고향 부산과 마산이 열이틀 뒤 들고일어난다.
탈영한 이등병이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 나타나 사찰 색인표 1,300여 장과 디스켓을 내놓았다. 대상에는 여야 의원과 종교·언론·노동계 인사가 망라돼 있었다. 보안사는 기무사로 이름을 바꿨지만, 폭로한 그는 1992년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
공연윤리위원회가 영화를 미리 보고 상영을 막거나 자르던 제도를 헌법재판소가 검열로 보고 위헌이라 결정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8개항 선언에 서명했다. 서해 평화협력지대 등이 담겼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이순신 함대가 부산포의 왜선 100여 척을 깨뜨렸다. 원 기록은 음력 9월 1일이고, 양력 날짜는 부산시민의 날이 기준으로 삼은 환산이다.
조철호가 중앙고보 학생들로 조선소년군을 꾸렸다. 한국 스카우트 운동의 출발점이다.
미군정이 한국인 고문 11명을 임명했다. 김성수 등 한국민주당 쪽 인사가 중심이었고, 이 인선이 해방 정국의 판도에 영향을 주었다.
2년 뒤 올림픽의 예행연습이었던 서울 아시안게임이 막을 내렸다.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 의장. 주석을 네 번 지내며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울 때 곁을 지켰다. 1940년 중국 치장에서 숨졌다.
우리 나비 이름을 짓고 분류한 학자. 전쟁 중 서울에서 총탄에 맞아 숨졌다.
해방 뒤 처음으로 한국과 일본 정부가 도쿄에서 공식 협상 자리에 앉았다. 국교 정상화까지는 14년이 더 걸린다.
철원의 이름 없는 395고지를 두고 국군 9사단과 중공군이 열흘을 싸웠다. 열두 번 주인이 바뀌었고, 포격에 흙과 나무가 날아가 능선이 흰 말처럼 보였다는 데서 이름이 붙었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일진회를 이끌고 합방 청원을 주도한 사람. 병합 뒤 일본에게서 백작 작위를 받았다.
병합에 협력한 이완용 등 76명이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75명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유엔총회가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을 두는 결의를 채택했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국제적 명분이 됐다.
충남 홍성에서 규모 5.0 지진이 났다. 한반도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남겼고 지진 관측체계를 손보는 계기가 됐다.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계획에 따라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에 들어가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침입 부대에는 조선 훈련대도 섞여 있었다. 이 일이 단발령과 함께 을미의병의 불씨가 된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서울과 평양의 축구 맞대결이 처음 열렸다. 남북을 대표하는 두 도시의 라이벌전이었다. 개막 날짜는 자료 확인이 더 필요하다.
26년에 걸쳐 쓴 대하소설 「토지」가 다섯 부 전체로 묶여 나왔다. 마지막 원고를 끝낸 날은 그해 8월 15일이다.
한글날은 처음에 날짜가 달랐다. 실록의 음력 9월 29일을 기준으로 10월 말에 지내다가, 1940년 안동에서 해례본이 나오며 「9월 상한」이라는 구절이 확인됐고, 그 날짜를 양력으로 옮긴 것이 지금의 10월 9일이다. 올해로 580주년이다.
조선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미군정이 치안유지법·정치범처벌법 등 일제의 억압 법령을 폐지했다.
해병 청룡부대가 캄란만에 내렸다. 베트남에 간 한국군 첫 전투부대였다.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노린 북한 공작원의 폭탄이 터졌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김재익 경제수석 등 17명이 숨졌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북한이 첫 핵실험을 했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정조가 세운 새 도시의 성곽이 2년 8개월 만에 완성됐다. 음력 9월 10일의 일이다. 공사 기록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뒷날 복원이 가능했다.
조선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지 아홉 달 만에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서른하나였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김원봉이 중국 한커우에서 100여 명으로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 중국 관내에서 처음 생긴 조선인 무장부대였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정원을 훌쩍 넘겨 태운 여객선이 부안 위도 앞바다에서 뒤집혀 292명이 숨졌다. 언론은 선장이 도망쳤다고 썼지만 선장과 승무원은 배와 함께 숨져 있었다.
한국인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동아일보와 보성전문(고려대)을 세웠다. 해방 뒤 한국민주당을 이끌고 부통령을 지냈다. 친일 행적은 2017년 대법원에서 인정됐다.
정전 두 달 반 만에 사천 공군기술창에서 만든 2인승 비행기가 떴다. 설계 이원복, 조종 민영락. 한동안 사라졌다가 2004년 한 고등학교 지하창고에서 발견됐다.
분단 뒤 처음으로 남북 축구대표팀이 평양 5·1경기장에서 맞붙었다. 북한이 2대 1로 이겼다.
파리의 OECD 이사회가 한국 초청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정식 가입은 그해 12월 12일이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고종이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으로 고쳤다. 청의 속국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조선 이름 원두우. 1885년 인천에 온 선교사로 새문안교회와 연희전문(연세대)의 뿌리를 세웠다.
서울대병원 장윤석 교수팀이 국내 첫 시험관 아기를 받아냈다. 남녀 쌍둥이였다.
6월항쟁의 요구가 헌법이 됐다. 국회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가결했고 17일 뒤 국민투표로 확정된다.
을미의병부터 정미의병까지 문경·제천 일대를 누빈 의병장. 붙잡혀 경성감옥에서 처형됐다.
80명이 응시해 6명이 붙었다. 합격자 가운데 허헌이 있었다. 그는 뒤에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맡는다.
조선일보에 한국 첫 신문 연재만화가 실리기 시작했다.
새벽 안개 속에서 열차가 열차를 들이받아 수학여행 가던 초등학생 20명이 숨졌다.
광복군 출신 이범석이 만든 청년단체. 날짜는 9일·12일·13일로 자료가 엇갈린다.
「불놀이」로 한국 자유시의 문을 연 시인.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지만 1930년대 말부터 친일로 돌아섰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총독에서 물러나 일본 총리가 됐다. 무단통치를 설계한 사람이다.
공군사관학교의 전신이 문을 열었다.
대한민국과 캐나다가 국교를 맺었다.
임시정부 선전부장으로 김구 곁을 지킨 사람. 한국전쟁 때 납북돼 북에서 숨졌다.
열흘 동안 열두 번 주인이 바뀐 395고지가 국군 손에 남았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박정희가 윤보선을 15만여 표 차로 이겼다. 역대 가장 적은 표 차였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교련 반대 시위가 이어지자 서울에 위수령이 내려져 군인이 대학에 들어갔다. 첫날 1,889명이 연행됐다.
호송 중 탈주한 지강헌 일행이 북가좌동 가정집에서 인질을 잡았다. 요구한 것은 카세트테이프 하나였다. 이튿날 새벽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남기고 숨졌다.
오전 부산대 도서관 앞에 학생 500여 명이 모이며 유신 반대 시위가 시작됐다. 오후에는 시민이 합세했다. 열흘 뒤 10·26이 온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평북 선천 출신. 1909년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스물넷에 처형됐다.
맥아더가 내준 비행기로 도쿄를 거쳐 서울에 왔다. 33년 만의 귀국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헌법 일부의 효력을 멈췄다. 한 달 뒤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를 거친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대통령이 세 번 연임할 수 있게 한 개헌안이 65.1% 찬성으로 확정됐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학생 시위에 시민이 합세해 파출소와 언론사가 부서졌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군이 들어왔다. 1,058명이 연행됐다. 이틀 뒤 마산·창원에는 위수령이 내려진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성춘향」 「빨간 마후라」의 감독. 1978년 북한에 납치됐다가 1986년 빈에서 탈출했다. 생년은 1925년, 1920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울돌목 위에 국내 첫 사장교가 놓였다.
독립문에서 양재까지 16개 역이 한꺼번에 열렸다.
제주 4·3 진압 출동 명령을 받은 국군 14연대가 이를 거부하고 봉기했다.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이 대규모로 희생됐다. 2021년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 들어갔다. 한국전쟁 중 유일한 북한 수도 점령이다. 누가 먼저 들어갔는지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님 웨일스의 「아리랑」 주인공. 옌안에서 일본 간첩과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1983년 중국 공산당이 복권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4천억 원 비자금 계좌의 예금조회표를 꺼냈다.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길이 열렸다.
여의도광장에 차가 뛰어들어 2명이 숨지고 21명이 다쳤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처음 실명으로 증언했다. 그날은 지금 기림의 날이다.
청산리 전투의 지휘관.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고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가 됐다.
대한제국이 간도에 보낸 마지막 관리사. 연해주 의병을 이끌었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미 187공수연대가 평양 북쪽에 내려앉았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공수강하였다.
백운평 골짜기에 매복한 북로군정서가 일본군 전위대를 무너뜨렸다. 26일까지 엿새 동안 이어진 싸움의 시작이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출근길 오전 7시 38분, 다리 상판 50m가 한강으로 떨어져 32명이 숨졌다. 등굣길 학생들이 많았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미군정청 경무국이 만들어진 날로, 오늘날 경찰의 날이다. 일제 경찰 출신이 대거 남은 것이 해방 경찰의 짐이 됐다.
목표 고도 700km에 닿았지만 3단 엔진이 46초 일찍 꺼져 궤도에는 오르지 못했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보빙사로 미국에 갔고 갑신정변 뒤 망명해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인 첫 미국 대학 졸업생이다. 그해 가을 칼리지파크 정거장에서 열차에 치여 서른에 숨졌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정부 수립 뒤 첫 계엄이었다. 국무회의 추인은 25일에야 이뤄졌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7년 단임 대통령제를 담은 헌법이 확정됐다. 대통령은 여전히 체육관 선거로 뽑았다.
10·26 뒤 대통령이 됐다가 여덟 달 만에 물러났다. 12·12와 5·17에 대해 끝내 증언하지 않았다.
조선호텔에 65개 단체가 모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뽑았다. 좌익은 곧 빠져나갔다.
김구를 암살한 지 47년, 버스기사 박기서가 「정의봉」이라 새긴 몽둥이로 그를 죽였다.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한국이 우승해 2연패를 했다.
판사 출신 정치인. 법무부장관을 지냈다.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이 외부 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 불법 연행 거부를 결의했다. 광고 탄압이 이어졌고 이듬해 주도 기자 대부분이 쫓겨났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포항제철 초대 사장. 부산 동래 임랑리에서 태어났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전쟁 중 유엔 참전을 기려 공휴일로 정했다. 1976년 폐지됐다.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PC를 보도했다. 같은 날 오전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개헌을 제안했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올리고 관할에 석도를 넣었다. 관보 게재는 27일이다. 독도의 날은 이 칙령에서 왔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봉오동과 청산리의 장군은 말년에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 수위로 일했다. 해방 2년 전 숨졌고 2021년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온정리 일대에서 중공군이 국군과 처음 맞붙었다. 1차 공세의 시작이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무정」의 작가, 대표적 친일 문인. 한국전쟁 때 납북돼 자강도에서 병으로 숨졌다.
오전 9시 30분 무렵,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했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궁정동 안가 만찬 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다. 유신 체제가 끝났다. 안중근 의거와 같은 날이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백운평에서 어랑촌까지 엿새 동안 이어진 싸움이 끝났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국군 6사단 7연대가 초산에서 압록강에 이르렀다. 바로 그 무렵 중공군이 전선에 들어와 있었다.
10·26 다음 날 문경 가은 지하 갱도에서 불이 나 광부 44명이 연기에 갇혀 숨졌다. 신문 1면은 대통령 영정이 덮었다.
신군부가 군경 3만여 명을 보내 전국 사찰을 뒤지고 승려 153명을 연행했다.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한 유신헌법안이 공고됐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직선제 개헌안이 93.1% 찬성으로 확정됐다. 같은 날 1980년에는 5공화국 헌법이 공포·시행됐다.
29개 대학 학생들이 건국대에서 결성식을 연 뒤 경찰에 포위돼 나흘 동안 건물에서 농성했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동두천 기지촌에서 여성이 미군에게 살해됐다.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카타르 도하에서 북한을 3대 0으로 이긴 뒤, 일본이 이라크와 비기며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올랐다.
핼러윈을 앞둔 토요일 밤,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159명이 숨졌다. 올해로 4주기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9차 개정 헌법이 공포됐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헌법이다.
종로에서 관리와 백성이 함께 모여 여섯 가지 개혁안을 결의했다. 고종이 받아들였지만 두 달 뒤 독립협회는 해산된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청계광장에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첫 촛불이 켜졌다. 이듬해 3월 탄핵까지 이어진다.
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통학 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긴 일로 싸움이 났다. 사흘 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대한국민항공사가 서울-부산 국내선을 처음 띄웠다. 뒤에 항공의 날의 근거가 됐다.
축제를 마친 학생들이 모인 호프집에서 불이 나 56명이 숨졌다. 주인은 계산을 하지 않고 나갈까 봐 문을 막았다.
박문국이 펴낸 첫 근대 신문. 열흘에 한 번, 순한문으로 냈다. 음력 10월 1일을 양력으로 옮긴 날이다.
근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베트남 파병의 대가를 두고 오간 방문. 미국 대통령으로는 두 번째 방한이었다.
신설동에서 종합운동장까지 14.3km가 열렸다.
「황소 30」 작전으로 헬기와 경찰 병력이 투입돼 90분 만에 끝났다. 1,500여 명이 연행돼 1,288명이 구속됐다.
근현대 지도에서 이 사건 보기 ›응급환자를 태우고 독도를 떠난 소방헬기가 바다에 떨어져 7명이 숨졌다.
이달의 역사는 한국사·인물·세계사 세 갈래로 날마다 몇 가지를 고른다. 생몰일은 양력이며 음력 기록은 양력으로 바꿔 적었다. 사건 카드가 있는 것은 그 시대 지도로 이어진다. 빠진 날과 잘못은 광장에 알려 주시면 고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