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 죄를 밝히지 않고 처형한 이유

1618 8월 · 한양 서시

앞 편에서 누이의 시를 모아 세상에 낸 그 동생이다.

1569년에 태어나 1618년에 죽었다. 마흔아홉이었다.

어떤 사람이었나

스물여섯에 과거에 급제했고 형조판서까지 올랐다.

그런데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파직되었다. 이유는 대체로 행실 문제였다.

승려들과 어울렸고 불교를 공부했다. 유교 국가의 관료로서는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서얼 출신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스승 이달이 서얼이었고, 뒤에 역모 사건에 연루되는 서얼 출신 인물들과도 왕래가 있었다.

무엇을 썼나

그가 남긴 글 가운데 두 편이 특히 자주 인용된다.

「유재론」은 인재를 쓰는 문제를 다룬 글이다. 하늘이 재주를 내릴 때 문벌을 가리지 않는데 사람이 문벌로 사람을 가려 쓰니,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취지다. 서얼과 천인 출신을 쓰지 않는 조선의 관행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호민론」은 더 나아간다.

그는 백성을 셋으로 나눴다. 시키는 대로 사는 항민, 원망하되 행동하지 않는 원민, 그리고 마음속에 뜻을 품고 때를 기다리는 호민이다.

그리고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호민이 일어설 때이며, 그러니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백성이라고 썼다.

조선의 고위 관료가 쓴 글로는 대단히 드문 내용이다.

1618년

광해군 대, 그는 역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남대문에 흉방이 붙은 사건, 그리고 그의 측근들이 관련된 모의가 드러난 사건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 사건의 처리가 이상하다.

국문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처형이 결정되었다. 그가 죄를 인정했다는 기록도 분명하지 않다.

실록에도 그가 자백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기록이 있다. 형장으로 끌려가며 할 말이 있다고 외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조선에서 대신급 인물을 이렇게 처리한 경우는 드물다.

왜 서둘렀나

짐작해볼 만한 사정이 있다.

당시 그는 이이첨 등 대북 세력과 함께 인목대비 폐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권력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가 국문에서 무엇을 말할지 두려워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다만 이것도 추정이다. 확실한 것은 그의 죄상이 끝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채 처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능지처참되었고 시신은 거두어지지 못했다.

조선이 무너질 때까지 그는 복권되지 않았다. 역적으로 남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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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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