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은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이었고, 형 허봉과 누이 허난설헌 모두 시로 이름났다. 스물여섯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파면과 복직의 연속이었다. 불교를 가까이한다는 이유로, 기생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서얼들과 사귄다는 이유로 거듭 탄핵됐다. 1611년에는 전라도 함열로 유배됐고, 그곳에서 문집 성소부부고를 정리했다.
1618년,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능지처참됐다. 국문 절차가 온전히 이뤄지지 않은 채 처형이 서둘러 집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핵심 사상
허균의 글 중 가장 날이 선 것이 호민론이다.
그는 백성을 셋으로 나눴다. 법을 지키며 부림을 당하는 항민, 수탈에 원망만 하는 원민, 그리고 남몰래 때를 기다리며 세상을 엿보는 호민이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통치자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원망하는 백성이 아니다. 원망만 하는 자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진짜 위험은 호민이다. 호민이 일어서면 원민이 따라 일어서고 항민까지 휩쓸린다.
또 하나가 유재론이다. 하늘이 인재를 낼 때 문벌을 가려 내지 않는데, 사람이 문벌로 인재를 버린다는 비판이다. 서얼과 서북 지방 출신을 배제하는 조선의 관행을 정면으로 겨눴다.
두 글의 공통점은 신분 질서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당대의 역할
허균은 글로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서얼 출신들과 어울렸다. 이른바 강변칠우로 불린 서얼 지식인들과 교유했고, 이들이 연루된 1613년 계축옥사 때 그도 위기를 겪었다.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이라는 통설은 택당 이식의 기록에 근거한다. 서얼 차별과 부패한 관리, 이상국가 율도국이라는 주제가 유재론·호민론과 겹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다만 현전하는 한글본이 후대에 고쳐진 것이라는 점, 그의 저작임을 직접 확인할 사료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신중론도 있다.
그는 또한 조선 지식인 중 드물게 중국의 이단 사상가 이지(이탁오)의 책을 구해 읽었다. 그가 사행에서 사 온 책 목록에 이지의 저술이 있었다고 전한다.
논쟁
허균을 혁명가로 볼 것인가는 논쟁적이다.
그를 봉건 질서에 맞선 선구자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신분제를 비판하고 민중의 힘을 통찰했다는 것이다.
반면 그의 실제 행보가 그 사상과 일치했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 그는 광해군 정권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랐고 권력 다툼에 깊이 관여했다. 그의 처형이 순수한 사상 탄압이라기보다 정치 투쟁의 결과였다는 해석이 그래서 나온다.
또 하나 조심할 점은 그를 근대적 평등주의자로 읽는 것이다. 유재론은 신분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인재 등용에서 문벌을 따지지 말라는 주장이다. 그 시대의 논의 안에서도 충분히 급진적이었지만, 오늘의 평등 개념과는 다르다.
오늘 읽기
호민론의 통찰은 지금도 유효하다. 사회를 흔드는 것은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상황을 읽고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것.
허균이 무서운 것은 그가 이 사실을 지배층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계층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고를 한 대가로 그 계층에게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