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공주 — 무덤 벽화로만 말하는 발해의 딸

792 6월 · 용두산(중국 지린성 화룡)

발해 문왕에게는 딸이 여럿 있었다. 그중 둘의 무덤이 20세기에 발견되었다.

1949년에 정혜공주의 무덤이, 1980년에 정효공주의 무덤이 나왔다. 두 무덤 모두 묘지명을 품고 있었다.

발해 사람에 대해 이만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이것 말고 거의 없다.

무덤이 말한 것

정효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이고, 792년에 서른여섯의 나이로 죽었다. 남편과 어린 딸을 먼저 잃고 홀로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고 묘지명은 적었다.

묘지명의 문장은 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짝지어 쓰는 변려체다. 중국 고전에서 끌어온 표현이 곳곳에 들어 있다. 발해 지배층의 한문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덤 자체도 특별하다. 벽돌로 쌓았고 그 위에 탑을 세운 구조다. 당의 무덤 양식과 고구려의 요소가 함께 들어 있다는 점이 오래 논의되어 왔다.

벽에 그려진 사람들

무덤 안 벽에 사람 열두 명이 그려져 있었다.

무사, 시종, 악사, 내시로 보이는 인물들이다. 붉고 푸른 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둘렀으며 손에 각각 다른 물건을 들고 있다.

이 벽화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발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입었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이것 말고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문헌으로만 알던 나라의 사람들이 얼굴을 가지고 나타난 셈이다.

황상

두 공주의 묘지명에는 눈에 띄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아버지 문왕을 가리켜 황상(皇上)이라 적었다.

황제에게 쓰는 말이다. 발해는 대외적으로 당의 책봉을 받는 나라였다. 그런데 자기 딸의 무덤 안에서는 아버지를 황제의 격으로 적었다.

앞서 무령왕릉 지석에서 백제 왕의 죽음에 붕(崩)을 쓴 것과 같은 구조다. 밖으로 향한 문서와 안으로 향한 문서가 다르다.

무덤 안에 적은 글은 남에게 보이려고 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회가 스스로를 어떻게 여겼는지 드러난다.

남은 문제

두 무덤 모두 지금 중국 영토 안에 있다. 발굴과 연구도 중국 쪽에서 이루어졌다.

발해 유적에 대한 접근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은 이 분야 연구의 오래된 제약이다. 그리고 그 제약 자체가 앞 편에서 본 귀속 논쟁과 얽혀 있다.

딸의 무덤에 새겨진 아버지의 호칭 하나가, 천이백 년 뒤의 논쟁에 놓인 몇 안 되는 실물 증거가 되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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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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