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 섬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돌에 새겨진 이름

462 6월 · 공주 송산리

백제 25대 임금이다. 한성을 잃고 웅진으로 내려온 뒤 흔들리던 나라를 다시 세운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사전에 들어오는 이유는 업적이 아니라 출생이다.

두 개의 기록

삼국사기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적었다.

일본 기록은 전혀 다르다. 『일본서기』는 개로왕이 아우 곤지를 왜에 보낼 때 임신한 부인을 함께 딸려 보내면서, 도중에 아이를 낳거든 어디서든 즉시 돌려보내라고 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 부인이 축자의 각라도라는 섬에서 아이를 낳았고, 그래서 그 아이를 섬 임금이라는 뜻의 사마(嶋君)라 불렀으며, 약속대로 백제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이렇게 어긋나는 경우는 흔하다. 보통은 어느 쪽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무덤이 열렸다

1971년 여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벽돌로 쌓은 무덤 하나가 드러났다.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유일한 무덤이었다. 그리고 입구에 지석 두 장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斯麻王)이 62세가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사마. 일본서기가 적어둔 그 이름이다.

그리고 계묘년은 523년이고, 62세에서 역산하면 462년생이 된다. 일본서기가 곤지의 부인이 아이를 낳았다고 적은 해와 맞는다.

1400년 전 사람이 자기 이름과 나이를 돌에 새겨 자기 무덤 입구에 놓아두었고, 그것이 도굴꾼을 피해 그대로 남아 있다가 20세기에 열렸다. 한국 고고학에서 이만큼 결정적인 발견은 드물다.

무엇이 확인되고 무엇이 남았나

확인된 것은 이름과 나이와 죽은 날이다.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였다는 것, 그가 462년에 태어났다는 것.

그래서 일본서기의 출생 기록이 완전히 허구는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다만 그가 정말 섬에서 태어났는지, 곤지의 아들인지 동성왕의 아들인지는 지석이 말해주지 않는다. 지석에는 아버지 이름이 없다.

지석에는 또 하나 이상한 대목이 있다. 무덤 자리를 토지신에게서 돈을 주고 샀다는 내용의 매지권(買地券)이 함께 나왔고, 실제로 중국 화폐인 오수전 꾸러미가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왕이 땅의 신에게 대금을 치른 것이다.

그리고 지석은 왕의 죽음에 붕(崩)이라는 글자를 썼다. 중국 황제에게 쓰는 글자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던 나라의 왕이, 자기 무덤 안에서는 스스로를 황제의 격으로 적었다.

무덤 하나가 사서 두 권이 다투던 문제를 정리하고, 대신 새로운 질문 몇 개를 남겼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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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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