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 진 사람의 기록만 남았다

918 6월 · 철원 · 세달사

삼국사기 열전은 사람을 여러 갈래로 나눠 싣는다. 그 마지막 갈래의 이름이 반역이다. 궁예와 견훤이 거기 실려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기록이 반역조에 실렸다는 것은, 그를 무너뜨린 쪽이 그 기록을 정리했다는 뜻이다.

태어날 때부터

삼국사기는 그가 신라 헌안왕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 적었다. 어느 쪽인지 확정하지 않았다.

오월 오일에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 이빨이 있었고 지붕 위에 흰 빛이 무지개처럼 뻗쳤다. 일관이 아뢰기를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기르지 마시라 했다.

왕이 죽이라 명했다. 사람이 아이를 강보에 싸서 다락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찔렀다. 그래서 한쪽 눈이 멀었다.

유모가 아이를 안고 도망쳐 숨어 길렀다.

승려에서 왕으로

자라서 세달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법명은 선종이었다.

신라가 무너지던 때다. 그는 891년 죽주의 기훤에게 갔다가 대접이 시원찮자 이듬해 북원의 양길에게 갔다. 양길이 군사를 나눠주자 강원도 일대를 차례로 차지했고, 마침내 양길을 밀어냈다.

901년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잇겠다고 했다. 뒤에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다시 태봉으로 바꾸었다. 도읍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한때 그의 영역은 후삼국 가운데 가장 넓었다.

미륵불

그 뒤의 기록이 이 사람을 규정한다.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했다. 머리에 금빛 두건을 쓰고 몸에 승복을 걸쳤다. 두 아들을 청광보살과 신광보살이라 불렀다.

외출할 때는 흰 말을 탔는데 말갈기와 꼬리를 비단으로 꾸미고, 소년소녀들에게 깃발과 향과 꽃을 들려 앞세우고 승려 이백여 명에게 염불하며 따르게 했다.

스스로 경전 스무 권 남짓을 지었다. 승려 석총이 그것을 두고 사악한 말이라 비판하자 그를 때려죽였다.

관심법이라는 것을 한다고 했다.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부인 강씨가 그의 잘못을 간하자 다른 남자와 통했다며 죽였고 두 아들도 죽였다.

918년, 신하들이 왕건을 추대했다. 궁예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도망쳤다가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 백성에게 맞아 죽었다고 기록됐다.

어디까지 읽을 것인가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읽을 수 있는가를 두고 오래 논의가 있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모두 고려에서 편찬됐다. 궁예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의 기록이다. 왕건의 즉위를 정당화하려면 앞사람이 폭군이어야 한다.

특히 마지막 대목들이 그렇다. 관심법으로 아내와 아들을 죽였다는 서술은 그를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만든다.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 맞아 죽었다는 최후도 그렇다.

반대로, 그가 미륵을 자처하고 새 경전을 지었다는 대목 자체는 조작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그런 통치를 시도했고 그것이 지지층을 잃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그는 신라를 무너뜨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한때 후삼국에서 가장 강했으며, 자기 손으로 세운 나라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록은 전부 그를 쫓아낸 쪽이 남겼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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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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