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타지 — 늙은 여우를 쏜 궁수

890 · 곡도(백령도) 서해

진성여왕 때의 일이다. 왕의 막내아들 양패가 당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활 잘 쏘는 사람 오십 명을 뽑아 데리고 떠났다.

배가 곡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크게 일어 열흘 넘게 머물러야 했다. 점을 치니 섬 안의 신령한 못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나왔다. 제사를 지내자 못물이 한 길이나 솟구쳤다.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남겨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다.

이름을 적어 던지다

양패가 깨어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구를 남겨야 하겠는가.

한 사람이 말했다. 나무 조각 오십 개에 각자 이름을 써서 물에 담가, 가라앉는 사람으로 정하시라고.

그대로 했다. 거타지(居陀知)라는 사람의 조각이 물에 잠겼다. 그를 남겨두고 배는 떠났고, 그러자 순풍이 불었다.

노인의 부탁

혼자 섬에 남아 시름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의 신이다. 해 뜰 때마다 젊은 승려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며 이 못을 세 바퀴 돈다. 그러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르고, 그가 내 자손들의 간을 빼먹는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부부와 딸 하나뿐이다. 내일 아침에도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가 쏘아달라.

거타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제가 맡겠습니다.

이튿날 아침, 정말 승려가 내려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노인의 간을 취하려는 순간 거타지가 활을 쏘았다. 승려는 화살에 맞고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노인이 고마워하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변하게 해 품에 넣어주었다. 용 두 마리가 그를 받들어 사신의 배를 따라잡게 하고 당까지 호위했다.

당에서 돌아온 뒤 그가 꽃가지를 꺼내니 여자로 변했고, 두 사람은 함께 살았다.

같은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이 이야기의 구조는 250년 뒤 고려에서 그대로 다시 나타난다.

고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설화다. 작제건이 당으로 가는 배에서 안개를 만나 홀로 섬에 남고, 서해 용왕이 나타나 늙은 여우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호소하고, 작제건이 활로 그 여우를 쏘아 죽이고, 용왕의 딸을 아내로 얻는다.

인물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뼈대가 같다.

고려 왕실이 자기 조상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신라에 있던 이야기를 가져다 쓴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새 왕조가 자기 시작을 신비롭게 꾸밀 때, 없는 이야기를 짓기보다 이미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에 조상의 이름을 넣는 편이 잘 먹힌다.

거타지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이야기는 왕가의 족보 속으로 옮겨 가 오래 살아남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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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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