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동아시아 바다를 사실상 지배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집안 출신인지 알려주는 기록이 없다.
이름부터 문제다
삼국사기는 그를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도 한다고 적었다.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본다.
장보고(張保皐)라는 이름은 당에서 활동하며 얻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장(張)이라는 성 자체가 당에서 붙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를 부르는 이름은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이름이 아니다.
신라에서 그의 신분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당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는 것을 보면, 신라에서는 오를 자리가 없던 처지였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가 한 일
당에서 그가 본 것은 신라 사람들이 붙잡혀 와 노비로 팔리는 광경이었다. 삼국사기는 그가 흥덕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고 적었다. 중국 어디를 가나 우리 사람이 노비가 되어 있으니, 청해에 진을 두어 도적이 사람을 잡아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828년 청해진이 설치되고 그가 대사가 되었다. 군사 1만을 거느렸다고 기록됐다.
그 뒤 그는 해적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신라와 당과 일본을 잇는 교역망을 장악했다. 중국 산둥에는 그가 세운 절 법화원이 있었다. 일본 승려 엔닌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그 절과 신라인 사회의 모습이 자세히 적혀 있다. 엔닌은 장보고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 국가의 통제 밖에서 국제적인 조직을 운영한 것이다.
왕을 만들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을 받아들이고 군사를 내어 서라벌을 쳤다. 그렇게 김우징이 신무왕이 되었다.
왕을 만든 사람이 된 뒤 그는 자기 딸을 다음 왕의 왕비로 들이려 했다. 조정이 반대했다. 해도(海島) 사람의 딸을 왕실에 들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846년, 조정이 보낸 염장이라는 자가 거짓으로 항복해 그에게 접근했다. 술자리에서 그를 죽였다.
청해진은 뒤에 헐렸고 그곳 사람들은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세 나라의 기록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은 신라와 당과 일본에 모두 있다. 그런데 세 기록의 인상이 다르다.
삼국사기는 그를 반란을 꾀하다 죽은 사람으로 정리하는 쪽에 가깝다. 당의 기록은 두목이라는 문인이 쓴 글에서 그를 의리 있는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일본 기록에는 교역 상대이자 실력자로 나온다.
한 사람을 두고 세 나라가 각각 다른 자리에 놓은 셈이다. 그리고 정작 그가 태어난 나라의 기록이 가장 인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