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충남 부여의 한 마을에서 돌 하나가 발견됐다. 가로로 긴 화강암 판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넉 줄뿐이다. 오른쪽이 잘려 나갔고 왼쪽도 온전하지 않다. 그런데 그 넉 줄이 백제 사람이 직접 쓴 글로 지금까지 전하는 거의 유일한 문장이다.
무엇이 적혀 있나
첫 줄에 이름과 때가 나온다. 갑인년 정월 아무 날, 나지성의 사택지적(砂宅智積)이라는 사람이 몸이 날로 쉽게 가고 달로 쉽게 돌아옴을 슬퍼했다는 것이다.
갑인년은 654년, 의자왕 14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가 망하기 6년 전이다.
다음 줄에서 그는 금을 뚫어 진귀한 당(堂)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고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이런 구절이 남아 있다. 높다랗고 자비로운 모습은 신령한 빛을 뿜어 구름을 보내고, 우뚝하고 인자한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
거기서 돌이 끊긴다.
왜 특별한가
백제의 글은 거의 남지 않았다. 백제 사람이 쓴 역사서도, 문집도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백제는 대부분 신라 계열 자료와 중국·일본 기록을 통해 본 백제다.
그래서 이 비석은 백제 사람의 문장 감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다. 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짝지어 대구를 이루는 변려체로 쓰였고, 그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데 이견이 없다.
한 가지 더. 이 글에는 승전도 왕의 공덕도 없다. 늙어가는 것이 슬퍼서 절을 지었다는 개인의 이야기다. 백제 최상층 귀족이 자기 마음을 적어놓은 문장이 남은 셈이다.
사택이라는 성
사택씨는 백제의 대성팔족, 곧 가장 유력한 여덟 가문 가운데 하나다. 좌평을 여럿 배출했다.
그리고 앞 편에서 본 미륵사지 사리봉영기의 발원자, 곧 백제 왕후의 아버지가 좌평 사택적덕이다. 같은 가문이다. 무왕의 왕후를 낸 집안이 의자왕 때까지 최상층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다만 사택지적과 사택적덕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부자인지 형제인지 먼 친척인지 밝혀줄 자료가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사택지적이 어떤 벼슬을 지냈는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백제가 무너질 때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삼국사기에도 삼국유사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남은 것은 돌 한 장과, 몸이 쉽게 간다고 슬퍼한 문장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