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 — 노래 하나로 공주를 얻었다는 사람

600 · 익산 미륵사지

삼국유사 무왕조에 실린 이야기다.

백제 서울 남쪽 못가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이가 있었다. 마를 캐어 팔아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동(薯童)이라 불렀다. 마 캐는 아이라는 뜻이다.

그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갔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친해진 뒤 노래 하나를 지어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노래가 서울에 퍼져 궁궐까지 들어갔다. 신하들이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했다. 떠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귀양길에 서동이 나타나 절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몰랐지만 우연히 믿고 따랐고, 그 뒤에야 노래가 맞았음을 알았다.

금이 있었다

백제로 온 뒤 공주가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살아갈 계획을 세우자고 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주가 황금이며 백 년의 부를 이룰 수 있다고 하자,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이것이 흙처럼 쌓여 있다고.

공주가 놀라 그 금을 신라 궁궐로 보내자고 했다. 서동은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려 하룻밤에 금을 신라로 옮겼고, 진평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 일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미륵사

어느 날 왕과 왕비가 사자사로 가는 길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왕비가 이곳에 큰 절을 세워달라고 청했고,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웠다. 그렇게 미륵사가 세워졌다는 것이 삼국유사의 서술이다.

2009년에 생긴 문제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쪽 석탑을 해체 수리하던 중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그 안에 금판으로 된 봉영기가 들어 있었다.

거기에 발원자가 적혀 있었다. 백제 왕후이며,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그리고 기해년, 곧 639년에 절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고.

선화공주라는 이름은 없었다.

이 발견 이후 논의가 갈렸다. 선화공주 이야기 자체가 후대의 설화라고 보는 견해, 무왕에게 여러 왕후가 있었고 사택씨는 그중 한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 미륵사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성되었고 봉영기는 서탑에 한정된 기록이라고 보는 견해가 함께 나왔다.

어느 쪽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만 천 년 넘게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이야기가 금판 한 장 때문에 흔들렸다는 사실은 남았다.

서동은 누구였나

무왕의 즉위 과정 자체가 불분명하다. 삼국사기는 그를 법왕의 아들이라 적었지만, 삼국유사는 과부의 아들이라 했다. 왕족의 방계 출신이 즉위한 사정이 마를 캐던 아이 이야기로 남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노래 하나로 공주를 얻고 금을 흙처럼 가졌다가 왕이 된 사람. 이런 이야기가 정사가 아니라 승려가 쓴 책에 남았다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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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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