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 때 고구려의 골칫거리는 선비였다. 험한 지형을 끼고 앉아 고구려가 강하면 지키고 약하면 나와서 노략질했다. 왕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저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부분노(扶芬奴)가 나섰다. 힘으로는 안 되고 꾀로 해야 한다고.
그가 낸 계책
방법은 이랬다. 약한 병사 몇을 보내 일부러 지고 달아나게 한다. 선비가 우리를 얕보고 성을 비운 채 멀리까지 쫓아 나올 것이다. 그때 정예를 험한 길로 돌려보내 빈 성으로 들여보낸다. 자신이 그 정예를 이끌겠다고 했다.
왕이 그대로 했고, 선비는 그대로 걸려들었다. 성문 앞까지 쫓아 나온 사이 부분노의 군사가 뒤로 돌아 성을 차지했다. 돌아온 선비군은 앞뒤로 갇혀 항복했다.
그 뒤가 이 사람의 대목이다
왕이 상으로 식읍을 주려 했다. 땅과 그 땅의 사람을 통째로 주는 것이니 당시로서는 최고 대우다. 그런데 부분노는 받지 않았다. 이는 저의 공이 아니라 대왕의 위엄이라는 것이 그가 댄 이유였다.
왕은 대신 황금 서른 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사양할 수 없는 형태로 바꿔 준 셈이다.
그리고 그가 나오는 기록은 여기까지다.
이 장면이 이상한 이유
고구려 초기 기록에서 상을 사양하는 신하는 흔하지 않다. 오히려 공을 세우고 대가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였다.
그래서 이 대목을 후대 유교적 신하상이 덧입혀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12세기 고려의 눈으로 이상적인 신하를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식읍을 받는다는 것은 왕권과 나란한 독자 기반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 왕권이 단단하지 않던 시기에 그것을 굳이 사양한 정치적 판단으로 읽는 시각도 있다. 겸손이 아니라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남은 것은 계책 하나와, 사양 한 번과, 그 뒤의 침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