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유가 나타난 바로 그 자리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삼국사기는 두 사람을 나란히 적었다. 북명 사람 괴유가 부여왕의 목을 베어오겠다고 한 뒤, 적곡 사람 마로(麻盧)가 나서서 긴 창을 바치며 길을 인도하겠다고 청했다는 것이다. 왕은 둘 다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 뒤가 없다
괴유는 이듬해 부여왕을 베고, 그해 겨울 병들어 죽고, 왕이 문병을 가고, 북명산에 묻힌다. 짧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다.
마로는 다르다. 창을 바치겠다고 말한 그 한 줄 뒤로 이름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 부여 정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살아 돌아왔는지, 언제 죽었는지 —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한국사에서 이렇게 깨끗하게 한 줄만 남기고 사라지는 인물도 드물다.
적곡은 어디인가
그가 왔다는 적곡(赤谷)도 위치가 확정되지 않았다. 붉은 골짜기라는 뜻의 이 지명은 고구려 초기 기록에 몇 번 나오는데, 오늘날 어디인지 특정하는 데는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괴유가 북명에서 오고 마로가 적곡에서 왔다는 것, 그러니까 둘 다 고구려의 중심이 아니라 바깥에서 온 사람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나라가 커지던 시기에 변방의 세력들이 왕의 군대에 합류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이름만 남았을까
짐작해볼 만한 사정이 있다. 기록이란 대개 결과를 남긴 사람의 것이다. 괴유는 왕의 목을 베는 눈에 띄는 결과를 만들었고, 마로는 그러지 못했거나, 만들었어도 누군가 적어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남았다는 사실 자체는 남는다. 김부식이 12세기에 이 대목을 옮겨 적을 때, 아무 뒷이야기도 없는 이 이름을 굳이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원래 자료에 그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리즈에 마로를 넣는 이유가 그것이다. 역사에 남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야기가 되는 것과, 이름만 남는 것. 후자가 훨씬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