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2대 임금이다. 주몽의 아들이고, 아버지가 남기고 간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 부여에서 건너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우리에게 남긴 것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은 나라도 성도 아니라 넉 줄의 노래다.
노래가 나온 자리
왕비 송씨가 죽은 뒤 유리왕은 두 여자를 맞았다. 골천 사람 화희와 한나라 사람 치희였다. 둘은 사이가 나빴다. 왕이 사냥을 나간 며칠 사이 다툼이 벌어졌고, 화희가 치희에게 한나라 계집이 어찌 이리 무례하냐고 쏘아붙였다. 치희는 부끄럽고 분해서 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돌아와 말을 달려 쫓아갔지만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들이 모여 노는 것을 보고 노래했다.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念我之獨 염아지독 誰其與歸 수기여귀
펄펄 나는 저 꾀꼬리 / 암수 서로 정답구나 / 외로울사 이 내 몸은 / 뉘와 함께 돌아갈까.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로 꼽히는 「황조가」다. 국문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린다.
같은 사람의 다른 기록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이 노래의 앞뒤를 마저 읽으면 인상이 달라진다.
태자 해명은 힘이 세고 용맹했다. 이웃 황룡국 왕이 강한 활을 선물로 보내자 해명은 그 활을 당겨 부러뜨리며 우리를 얕본 것이라고 했다. 유리왕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다. 그리고 황룡국 왕에게 사람을 보내 내 아들이 불효하니 그대가 죽여달라고 청했다.
황룡국 왕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내자, 유리왕은 아들에게 칼을 보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해명은 들판에 창을 거꾸로 꽂아 세우고 말을 달려 그 위로 몸을 던졌다. 스물한 살이었다.
몇 해 뒤 또 다른 아들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은 시신을 찾지 못해 슬퍼했고, 비류 사람 제수가 시신을 찾아 왔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왕비를 잃고, 사랑하던 여자를 놓치고, 아들 하나를 스스로 죽게 만들고, 또 다른 아들을 물에서 잃었다. 재위 37년의 기록이 그런 순서로 이어진다.
어느 쪽이 이 사람인가
혼자 남은 마음을 꾀꼬리에 빗대 노래한 사람과, 아들의 죽음을 이웃 나라에 부탁한 사람이 같은 사람이다. 이 어긋남이 유리왕을 이 사전에 넣는 이유다.
연구자들 사이에는 「황조가」를 개인의 실연이 아니라 세력 다툼의 은유로 읽는 견해도 있다. 화희와 치희가 각각 토착 세력과 이주 세력을 상징하며, 둘 사이에서 왕이 어느 쪽도 붙잡지 못한 상황을 노래했다는 것이다. 해명의 죽음 역시 태자를 지지하는 세력과 왕권 사이의 충돌로 보는 해석이 있다.
그렇게 읽으면 노래는 덜 애틋해지고 정치는 더 선명해진다.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 사람이 노래도 남기고 아들도 잃었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