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김새와 옷 — 흰옷 기록에는 조건이 붙어 있다

3 · 부여 · 신라

우리가 흰옷 입는 민족이라는 이야기는 어디서 왔을까. 출처를 따라 올라가면 대개 한 문장에 닿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조다. 나라 안에 있을 때는 흰옷을 숭상해, 흰 베로 지은 소매 넓은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在國衣尙白, 白布大袂, 袍·袴, 履革鞜).

3세기 기록이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근거가 여기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인용할 때 대개 빠지는 것이 있다. 바로 다음 문장이다.

나라 밖으로 나갈 때는 비단과 수놓은 옷감과 모직을 숭상하고, 대인은 여우와 너구리와 흰담비와 검은담비 가죽옷을 덧입으며 금과 은으로 모자를 꾸민다(出國則尙繒繡錦罽, 大人加狐狸·貁白·黑貂之裘, 以金銀飾帽).

두 문장은 짝이다. 안에서는 흰 베옷, 밖에서는 비단과 모피와 금은.

그러니 이 기록이 말하는 것은 부여 사람들이 늘 흰옷만 입었다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입는 옷과 나가서 입는 옷이 달랐다는 것이고, 신분에 따라서도 달랐다는 것이다. 대인은 담비 가죽을 덧입고 모자에 금은을 달았다. 두 문장 중 앞의 것만 떼어 쓰면 소박한 흰옷의 민족이라는 그림이 되고, 두 문장을 같이 읽으면 안팎과 신분에 따라 옷을 갈아입던 사회가 된다.

흰옷 기록은 한참 뒤에 다시 나온다. 7세기에 나온 수서 동이열전 신라 조는 신라의 풍속과 형벌과 의복이 대체로 고구려·백제와 비슷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옷 빛깔은 흰 것을 숭상한다(服色尙素).

부여의 3세기와 신라의 7세기 사이가 400년이다. 그 사이에 이 항목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은 많지 않다. 그래서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두어야 한다. 실제로 그 지역에서 흰옷을 즐겨 입는 관습이 오래 이어졌을 수도 있고, 중국 사서가 동쪽 사람을 적을 때 쓰던 서술 습관이 반복된 것일 수도 있다.

후자를 의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중국 기록에는 은나라 사람이 흰색을 숭상했다는 오래된 관념이 있다. 그리고 삼국지 부여전은 부여가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한다고 적는다. 은나라의 역법과 은나라의 색이 한 문단 안에 함께 나오는 것이다. 기록자의 머릿속에 이미 하나의 틀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여기서 이 시리즈가 늘 하는 구분이 필요하다. 원문이 말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3세기 부여 사람들이 나라 안에서 흰 베옷을 입었다고 중국인이 적었다. 그 이상은 해석이고, 해석에는 갈래가 있다.

옷에 대한 다른 기록도 몇 줄 남아 있다. 삼국지 고구려전은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며 말과 여러 가지가 부여와 비슷하지만 성격과 의복이 다르다고 적는다. 무엇이 어떻게 달랐는지는 적지 않았다. 우리가 가장 알고 싶은 대목이 늘 이렇게 비어 있다.

부여의 옷 기록을 다시 보면 재미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소매가 넓다는 말이 들어 있다. 그리고 가죽신을 신는다는 말도 있다. 이런 세부는 사신이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잘 나오지 않는다. 직접 본 사람이 있어야 나온다. 3편에서 이야기한 대로 위나라 군대가 그 일대를 지나며 얻은 견문이 이 기록의 바탕에 있다고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정리하면 이렇다. 흰옷 기록은 있다. 다만 그 기록은 조건이 붙은 기록이고, 짝이 되는 문장과 함께 읽어야 뜻이 산다. 그리고 400년을 건너뛴 두 번째 기록이 첫 번째의 되풀이인지 새로운 관찰인지는 아직 열려 있는 문제다.

사료 읽는 법. 한 문장만 떼어 인용하면 없던 그림이 생긴다. 특히 짝을 이루는 문장이 바로 뒤에 붙어 있을 때 그렇다. 어떤 구절을 만나면 그 앞뒤 두 문장을 반드시 함께 봐야 한다. 이 시리즈가 원문을 데이터로 따로 쌓아 두는 이유도 여기 있다. 앞뒤가 잘린 인용은 되돌리기 어렵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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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은 우리를 어떻게 적었나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