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년에 발해가 무너지고 936년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 두 사건 뒤로 중국 사서의 동쪽 항목이 눈에 띄게 단순해진다.
부여와 옥저와 예와 읍루와 삼한과 삼국이 각각 자리를 차지하던 동이전이, 이제 나라 하나만 적으면 되는 지면으로 바뀐다. 송사 권487에 고려가, 원사 권208에 고려가, 명사 권320에 조선이, 청사고 권526에 조선이 있다. 각각 한 편씩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그 편이 실린 자리의 이름이다. 송사는 외국전, 원사는 외이전, 명사는 외국전, 그리고 청사고는 속국전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부르는 이름이 바깥 나라에서 바깥 오랑캐로, 다시 딸린 나라로 옮겨 다닌다. 이 이름들이 실제로 무엇을 뜻했는지는 3부에서 조공과 책봉을 다룰 때 따로 이야기하겠다.
책마다 만듦새 차이가 큰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원사는 명나라 초에 서둘러 엮은 책이라 성글기로 이름이 났다. 반대로 명사는 청나라 때 오래 공을 들여 완성해서 짜임이 촘촘하다. 청사고는 조금 다른 물건이다. 1928년에 나온 원고본이고 정사로 확정되지 않아 책 이름에 원고를 뜻하는 고(稿) 자가 붙어 있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우리에게는 중국 사서의 무게가 확 줄어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기록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있고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삼국지 동이전 한 편에 기대야 했던 시절과는 사정이 다르다.
이 시리즈가 고대에 무게를 두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남의 기록이 절실한 것은 우리 기록이 없을 때다.
대신 이 시기에 값이 커지는 것이 하나 있다. 정사가 아니라 직접 와서 보고 쓴 견문록이다.
1123년, 송 휘종이 고려에 국신사를 보낸다. 예종의 죽음을 조문하고 인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것이 표면상의 임무였다. 그 사절단에 서긍이라는 사람이 끼어 있었고, 그는 고려에 관한 것을 모두 살펴 보고하라는 명을 따로 받았다.
일행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로 들어와 개경의 사신 숙소 순천관에 한 달 남짓 머물렀다. 그런데 고려 조정은 송 사신들의 바깥출입을 철저히 관리했다. 서긍이 숙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한 달 동안 대여섯 번이었다고 한다.
그 대여섯 번과 창밖으로 본 것과 들은 것을 가지고, 그는 돌아가 이듬해에 40권짜리 책을 지어 황제에게 바쳤다. 스물여덟 개의 큰 항목 아래 삼백 개가 넘는 작은 항목으로 나눈 책이다. 건물과 관청과 사당과 배와 뱃길과 그릇과 옷과 사람이 다 들어 있다. 제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 줄여서 고려도경이다.
도경이라고 한 것은 글과 그림을 함께 실었기 때문이다. 형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먼저 글로 설명하고 그림을 덧붙였다.
그런데 3년 뒤 정강의 변으로 송의 수도가 함락되면서 그림이 사라졌다. 43년이 지난 1167년에 서긍의 조카 서천이 남은 것을 다시 간행했는데, 그때는 이미 글만 남아 있었다. 우리가 오늘 읽는 고려도경에 그림이 없는 이유다.
1부를 여기서 닫으려는 이유가 이 이야기에 있다.
남이 우리를 적는 일의 전 과정이 이 한 권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보고 오라고 보낸 사람이 있었고, 보여주지 않으려는 쪽이 있었다. 대여섯 번의 외출로 한 나라를 적어야 했던 관찰의 한계가 있었고, 돌아가서 기억과 전문을 보태 쓴 보고서가 있었다. 그리고 전란이 그 절반을 가져갔고, 조카 한 사람이 나머지를 살렸다.
앞의 여덟 편에서 본 것도 결국 이 과정의 변주였다. 군대가 지나가며 본 것, 사신이 전한 말, 우리 쪽이 보낸 문서, 이긴 쪽이 붙인 형용사, 없어진 책의 인용된 조각. 어느 것도 그냥 사실이 아니었고, 어느 것도 그냥 버릴 것이 아니었다.
이제 책은 대강 다 보았다. 2부에서는 방향을 돌린다. 사서별로 읽는 대신, 옷이면 옷, 혼인이면 혼인 하나를 골라 여러 사서에서 뽑아 나란히 놓아 본다. 그러면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그대로 옮겨졌는지가 보인다.
사료 읽는 법. 견문록은 정사보다 생생하지만 그만큼 좁다. 서긍이 본 고려는 개경의 한 달이고 그중에서도 허락된 대여섯 번이다. 생생하다는 것과 전체를 봤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어떤 기록을 읽든 그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