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서가 동쪽 사람들을 적을 때 거의 빠뜨리지 않는 항목이 둘 있다. 혼인과 장례다.
왜 이 둘일까. 아마 그 사회의 질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누구와 짝이 되고, 그 뒤에 어디서 사는가. 사람이 죽으면 무엇을 함께 묻고 얼마 동안 슬퍼하는가. 여기에 재산과 권력과 신분이 다 얽힌다.
고구려의 혼인부터 보자. 삼국지 고구려 조는 이렇게 적는다.
혼인하는 풍속은 이렇다. 말로 이미 정해지면 여자 집에서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다(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사위가 저녁에 여자 집 문 밖에 이르러 자기 이름을 대고 무릎 꿇어 절하며 여자와 함께 자게 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하면 여자의 부모가 그제야 작은 집에서 자도록 허락하고, 곁에는 돈과 폐백을 쌓아 둔다. 아들을 낳아 장성하면 그제야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짧은 문단인데 절차가 다 들어 있다. 말로 먼저 정하고, 집을 짓고, 저녁에 찾아가 청하고, 두세 번을 거듭하고, 돈을 놓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러고 나서야 데리고 간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곳이 처가라는 점이다. 사위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방식이고, 그 기간이 아이가 클 때까지다. 이 제도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두고는 데릴사위제로 보는 견해와 노동을 제공하는 혼인으로 보는 견해가 갈려 왔다. 다만 어느 쪽으로 보든 이 기록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다. 3세기 중반 고구려에서 어머니 쪽 집안의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여의 혼인 기록은 성격이 다르다. 삼국지 부여 조에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곧바로 한마디가 붙는다. 흉노와 같은 풍속이다(兄死妻嫂, 與匈奴同俗).
이 한마디를 놓치면 안 된다. 기록자는 부여의 풍속을 적으면서 자기가 이미 아는 다른 집단에 견주었다. 중국 사서는 낯선 것을 적을 때 늘 아는 것에 견준다. 그러니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읽게 된다. 부여에 그런 관습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3세기 중국인이 그것을 흉노와 한 묶음으로 놓았다는 것이다.
장례로 넘어가면 부여 기록이 유난히 자세하다.
사람이 죽었을 때 여름이면 얼음을 쓴다. 사람을 죽여 함께 묻는데 많으면 백 명에 이른다. 후하게 장사 지내며 곽은 있고 관은 없다(其死, 夏月皆用氷. 殺人殉葬, 多者百數. 厚葬, 有槨無棺).
여름에 얼음을 쓴다는 것은 시신을 오래 두었다는 뜻이다. 얼마나 오래 두었는지는 배송지가 이 대목에 붙인 주에 나온다. 그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위략을 인용해, 그 풍속이 다섯 달 동안 상을 치르며 오래 끌수록 영예로 여긴다고 적었다.
그리고 같은 주에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상을 치르는 동안 남녀가 모두 순백을 입고, 부인은 베로 얼굴을 가리며 패물을 뗀다.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앞 편에서 흰옷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 흰옷이 다시 나온다. 이번에는 상복이다. 부여의 흰옷 기록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뜻이고, 하나는 평상의 옷이고 하나는 상중의 옷이다. 두 기록을 뭉뚱그려 흰옷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읽으면 그 차이가 사라진다.
더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한마디다.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앞의 형사취수에는 흉노와 같다고 적고, 상복에는 중국과 비슷하다고 적는다. 같은 기록자가 어떤 항목에서는 우리와 다르다고 하고 어떤 항목에서는 우리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를 따져 보는 것이 3부에서 할 일이다.
정리하면 혼인과 장례 기록은 두 겹으로 읽어야 한다. 무엇을 보았는가가 한 겹이고, 무엇에 견주었는가가 다른 한 겹이다. 견줌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견주는 사람의 자리를 드러낸다.
사료 읽는 법. 관습을 적은 기록에는 대개 비교가 따라붙는다. 흉노와 같다, 중국과 비슷하다, 고구려와 대체로 같다는 식이다. 이 비교를 그 사회에 대한 사실로 읽으면 안 된다. 비교는 기록자가 자기 서랍 가운데 어느 칸에 이것을 넣었는지를 알려 주는 표시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