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염 — 독립운동가의 아들, 상하이 영화의 황제

1934 · 상하이

1934년 상하이의 한 영화 잡지가 독자 투표로 영화 황제를 뽑았다. 1위는 김염이었다. 스물넷의 조선 청년이 중국 영화계의 최고 스타로 선출된 것이다.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은 상하이 사람들도 알았다. 알고도 뽑았다.

김염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국내 최초의 의사 중 한 사람이었는데, 독립운동에 관여하다 중국으로 망명해 만주에서 병원을 열고 독립군을 도왔다. 김염이 아홉 살 때 아버지가 급사했다. 일본 쪽의 독살이라는 말이 돌았다. 소년은 고모부 김규식을 비롯한 친척들 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조선의 독립운동가 집안 아이가 중국 대륙에서 성장한 것이다.

그는 영화를 택했다. 열여덟에 상하이로 가서 단역부터 시작했고, 몇 년 만에 중국 무성영화의 대표 배우가 됐다. 대로, 야초한화, 삼개모등여성 — 그가 나온 영화들은 1930년대 중국 영화사의 명작 목록이다. 그는 주로 가난한 노동자, 저항하는 청년, 시대에 부딪히는 인물을 연기했고, 관객들은 그 얼굴에 자기들의 시대를 겹쳐 봤다. 중국 영화의 황제라는 이름은 그렇게 붙었다.

그런데 그는 조선 사람이었고, 중국은 그때 일본과 전쟁 중이었다. 김염은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에 돌아갈 수 없었고, 상하이가 일본에 점령되자 일본 측의 영화 출연 요구를 거절하고 홍콩으로 피했다. 전쟁이 끝나고 새 중국이 서자 그는 그 나라의 배우로 남았다. 여배우 친이와 결혼했고, 상하이 영화계의 원로가 됐다.

마지막 시련은 문화대혁명이었다. 옛 상하이의 스타였다는 것, 외국 출신이라는 것이 모두 죄가 됐다. 그는 비판당하고 격리됐으며 병을 얻었다. 명예가 회복된 것은 그가 죽기 얼마 전이다. 1983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흔셋.

중국 영화사에서 김염은 전설이다. 상하이 영화박물관에 그의 자리가 있고, 그를 다룬 책과 다큐멘터리가 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아들이 중국의 영화 황제였다는 사실은 두 나라 사이 어디쯤에 놓인 채 어느 쪽 역사에도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이정기가 두 역사의 곁가지였던 것처럼, 김염은 두 대중문화의 곁가지다.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늘 시대에 맞서는 사람들이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시대가 그어 놓은 국경선 위에서 평생을 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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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계를 넘은 사람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