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민주화의 열망 — "야도"에서 "보수의 본진"이 되기까지
미군정에 맞선 첫 민중항쟁, 4·19를 촉발한 고등학생들, 유신의 사법살인까지 —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렸던 대구경북의 잊힌 얼굴
타임라인 (5개 지점)
- 대구 10월항쟁 — 해방 후 첫 민중항쟁 (1946 10월 1일 · 대구 (대구역))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와 강압적 곡물 수집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이어지던 중, 대구역 앞에서 경찰이 노동자를 향해 발포해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튿날 대구의과대학 학생들이 시신을 들고 거리로 나서면서 항쟁은 경상북도 전역과 전국으로 확산됐다 — 약 230만 명이 참여한, 해방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대구·경북에서만 9,500여 명이 검거됐고 5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 2·28 대구 학생의거 — 4·19의 도화선 (1960 2월 28일 · 대구 (경북도청 앞))
대구 경북고등학교(지금 황금동 교사), 2013년 · 사진 Eqipru02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자유당이 일요일 등교를 지시하자,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이를 간파하고 시내로 나섰다. 경북고·대구고·경북여고 등 8개 고교 1,200여 명이 참여한 이 시위는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최초의 조직적 고교생 시위였고, 3·15 마산의거·4·19혁명으로 이어지는 첫 불씨가 됐다.
- 여정남 — 경북대에서 전국 학생운동의 구심점이 되다 (1968 11월 · 대구 (경북대학교))
대구 경북대학교 본관, 2014년 · 사진 Ken Eckert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2·28 시위에 고등학생으로 참여했던 여정남은 경북대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세 차례 제적당하면서도 학생운동을 이어갔다. 1968년 경북대 총학생회 주최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9개 대학이 참여한 전국 대학생 학술토론회를 이끌며, 대구를 거점으로 전국 대학생 연합투쥁의 필요성을 앞장서 제기했다 — 이 활동이 훗날 그를 정권의 표적으로 만든다.
- 민청학련 사건 — 유신 반대 학생조직을 겨냥하다 (1974 4월 3일 · 대구 (경북대학교))
유신헌법 반대 서명운동이 30만 명을 넘어서자, 박정희 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정부를 전복하려는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하고 관련자 1,024명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 여정남도 이때 붙잡혔다 — 중앙정보부는 그를 단순 학생운동가가 아니라 "인혁당재건위 학원 담당책"이라는 프레임으로 엮기로 결정한다.
- 인혁당재건위 사형 집행 — "사법사상 암흑의 날" (1975 4월 9일 · 서울구치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옥사 내부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김지호 (공공누리 제1유형)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해 서도원·김용원·이수병·우홍선·송상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8명의 사형이 확정됐다. 가족 면회도 거부된 채, 확정 판결 불과 18시간 뒤인 4월 9일 새벽 8명 전원의 사형이 잇따라 집행됐다. 8명 중 4명이 대구경북 출신이었다 —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고, 2007년 재심에서 전원 무죄가 선고됐다.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대구경북의 진보적 흐름은 사실상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