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놀랄 만큼 적다. 언제 태어났는지 모른다. 언제 죽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식이 있었는지, 살수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 아무 기록이 없다. 심지어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그를 열전에 넣으면서 이렇게 적었다.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12세기의 최고 문장가가 국가의 장서를 동원하고도 이 사람의 내력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을지」가 성씨이고 「문덕」이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 「을지」가 성이 아니라 관직명이나 존칭이라는 견해도 있다. 선비족 계통의 위지(尉遲)씨와 연결짓는 견해도 있다. 중국 기록에는 「울지(尉支)」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 쪽도 확정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부르는 이름조차 정확히는 모르는 셈이다.
**그가 한 일**
612년, 수나라가 113만이라 기록된 대군을 일으켰다. 고구려의 인구는 100만에서 300만 사이로 추정된다. 상대의 군대가 이쪽의 인구와 맞먹었다.
을지문덕이 한 일은 네 단계로 정리된다.
첫째, 그는 적진으로 직접 걸어 들어갔다. 항복을 논의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수양제는 이미 그를 보거든 사로잡으라 명해둔 상태였다. 목숨을 건 정찰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병사들이 100일치 군량의 무게를 못 이겨 곡식을 몰래 버리고 있는 광경이었다.
둘째, 그는 적의 급소가 칼이 아니라 밥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30만이 깊숙이 들어올수록 보급선은 길어지고 끊기기 쉬워진다. 수는 많을수록 약점이 된다.
셋째, 그는 지는 법을 택했다.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물러섰다고 전한다. 물러서면서 곡식과 우물을 치웠다. 수나라군은 이기면서 전진했고, 이길수록 굶었다.
넷째, 그는 기다렸다. 수군이 성급하게 평양을 쳤다가 궤멸하고 협공이 사라진 뒤, 굶주린 별동대가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 그때 살수에서 앞뒤를 끊고 쳤다. 30만 5천 가운데 살아 돌아간 것이 2,700명이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을지문덕이 둑을 터뜨려 수나라 30만을 물에 쓸어버렸다"는 이야기는 학교에서 배운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수공(水攻)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수서』에도 없다. 사료가 전하는 것은 강을 반쯤 건넌 적을 양쪽에서 협공했다는 것뿐이다. 수공담은 후대에 덧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 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둑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는 한 번의 기발한 계략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그림이다. 사료가 그리는 그림은 다르다. 반년에 걸쳐 적을 굶기고 지치게 만들고 갈라놓은 뒤, 가장 약해진 순간을 골라 친 설계다. 전자는 재주이고 후자는 인내다.
**넉 줄의 시**
그가 남긴 것 가운데 확실히 전하는 것이 하나 있다.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오언사구(五言四句)의 한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다. 『삼국사기』 열전에 원문 그대로 실려 있다.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신묘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 / 기묘한 셈은 땅의 이치를 다했도다 /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 만족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
형식은 극찬이고 내용은 정반대다. 이길 만큼 이겼으니 그만 돌아가라 — 굶주린 군대를 이끌고 성 앞에 선 장수에게 이보다 아픈 말은 없다. 우리 문학사에 남은 가장 오래된 한시 가운데 하나가, 전장에서 적장을 조롱하기 위해 쓰였다.
생몰년도 가문도 남기지 못한 사람이 넉 줄의 시로 남았다.
**칼을 든 사람이었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을지문덕의 모습은 갑주를 입고 칼을 든 장군이다. 그런데 사료가 그리는 행적은 그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그를 두고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있고, 겸하여 글을 지을 줄 안다고 적었다. "겸하여(兼)"라는 한 글자가 눈에 띈다. 김부식은 문장 능력을 덧붙는 재주로 적었지만, 정작 그가 남긴 것은 시 한 편이다.
그가 한 일을 다시 보면 더 그렇다. 그는 사신의 자격으로 적진에 들어가 협상 자리에 앉았고, 적의 보급 상태를 읽었으며, 일부러 지면서 적을 끌어들였고, 마지막에는 시 한 편으로 적장의 판단을 흔들었다. 어느 대목에서도 그가 직접 칼을 휘둘렀다는 기록은 없다. 정보를 모으고 판을 짜고 상대의 심리를 건드리는 일 — 이것은 무장보다 참모의 일에 가깝다.
고구려의 관등 체계에서 그의 위치가 무관직이었는지 문관직이었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을지」가 관직명이나 존칭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것도 이 문제와 맞물린다. 다만 6~7세기 고구려에서 문·무의 구분은 후대 조선처럼 뚜렷하지 않았다는 점은 짚어둘 필요가 있다. 대대로나 막리지 같은 고위 관등은 행정과 군사를 함께 관장했다. 그러므로 "문신이냐 무장이냐"는 물음 자체가 후대의 틀일 수 있다.
그럼에도 사료가 남긴 인상은 분명하다. 그는 싸워서 이긴 사람이라기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설계한 사람이다.
**왜 기록이 없을까**
짐작해볼 만한 사정은 몇 가지 있다. 고구려는 멸망한 나라이고, 멸망한 나라의 기록은 남기 어렵다. 『삼국사기』는 그로부터 500년 뒤 신라를 계승한다고 여긴 왕조에서 쓰였다. 고구려 자체의 역사서인 『유기』나 『신집』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비석이 남았고, 연개소문은 정변과 대당전쟁의 기록이 제법 남았다. 유독 을지문덕만 승리의 규모와 개인의 흔적이 극단적으로 어긋난다.
확실한 것은 이것뿐이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지만, 그가 누구였는지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