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 과거에 장원한 사람이 상원수가 되었다

1019 2월 1일 · 귀주(평북 구성)

을지문덕은 기록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다. 강감찬은 반대다. 태어난 해도 죽은 해도 알고, 급제한 해와 등수도 알고, 무슨 벼슬을 언제 지냈는지도 안다. 『고려사』에 열전이 실려 있고 묘지명도 남았다.

그런데 그 기록을 읽으면 오히려 낯설어진다. 우리가 아는 강감찬과 사료 속의 강감찬이 잘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문관이었다**

948년 금주(오늘날 서울 관악구 낙성대 일대)에서 태어났다. 서른여섯이던 983년 과거에 응시해 갑과 장원으로 급제했다. 무과가 아니다. 고려의 과거에는 애초에 무과가 없었다.

급제한 뒤 그가 걸은 길도 문관의 길이었다. 예부시랑, 한림학사, 중추원사, 이부상서 — 문서와 인사와 의례를 다루는 자리들이다. 1010년 거란 2차 침입 때 그가 한 일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왕에게 남쪽으로 피하라고 진언한 것이었다. 조정이 항복을 논하던 자리에서 그는 지금은 항복할 때가 아니라 시간을 벌 때라고 말했다.

그가 처음으로 군을 지휘한 것은 1018년, 일흔한 살 때다. 급제한 지 35년 만이었다.

**일흔한 살에 20만을 맡다**

거란이 세 번째로 왔을 때 고려가 동원한 병력은 20만 8천 300명으로 기록됐다. 그 상원수 자리에 일흔한 살의 문관이 앉았다.

지금 감각으로는 기이한 인사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의 최고위 관직은 문무를 나누지 않았고, 전쟁이 나면 재상급 문관이 원수를 맡는 것이 오히려 통례였다. 서희도 문관이었고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었다. 윤관도 문관이었고 별무반을 만들었다. 문관이 군을 이끄는 것은 예외가 아니라 제도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였을까. 두 번의 침입을 다 겪었고, 조정이 항복으로 기울 때 버티자고 말한 사람이었으며, 그때 그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판명됐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이 전쟁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가 한 일**

흥화진에서 물을 가두었다가 터뜨리고 매복으로 쳤다. 소배압이 성들을 지나쳐 개경으로 내달리자 정면으로 막지 않고 옆구리와 뒤를 계속 물었다. 개경에서는 현종이 들을 비웠다. 굶주린 거란군이 회군하자 길목마다 기다렸다가 쳤다. 그리고 귀주에서 마지막으로 잡았다.

두 달이었다. 그 두 달 동안 10만이 수천으로 줄었다.

살수와 닮았다. 정면으로 부수지 않고, 적이 스스로 약해질 자리까지 데려간 뒤 가장 약해진 순간에 잡는 방식이다. 을지문덕도 강감찬도 자기 손으로 적을 벤 기록이 없다.

**수공(水攻)이라는 문제**

흥화진의 소가죽 이야기는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 분명히 실려 있다. 큰 하천을 소가죽으로 꿰어 막았다가, 거란군이 건널 때 터뜨렸다는 것이다.

살수의 수공담과는 사정이 다르다. 살수 쪽은 『삼국사기』에도 『수서』에도 아예 없는 후대의 부회지만, 이쪽은 사료에 있다. 다만 규모는 다른 문제다. 큰 강을 가죽으로 막는 일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규모였는지, 그 효과가 10만 대군에게 결정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기록에 있다는 것과 기록된 그대로였다는 것은 같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두 번의 대첩이 모두 물로 이겼다고 기억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야기가 좋아하는 형태에 대해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바뀌었다는 기록**

귀주에서 승부를 가른 것으로 『고려사』가 적은 것은 두 가지다. 김종현의 원병 1만이 후방에 닿은 것, 그리고 남풍이 갑자기 북풍으로 바뀌어 비바람이 거란군 쪽으로 몰아친 것.

자연현상이 승패를 갈랐다는 서술은 전근대 사서에 흔하다. 하늘이 도왔다는 말은 곧 이 승리가 정당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람이 불기 전에 이미 두 달이 있었다. 굶주림, 끊긴 보급, 쉬지 못한 행군, 계속된 추격. 바람은 마지막 한 번의 밀침이었지 원인이 아니었다.

**갑옷을 입은 문관**

『고려사』는 그의 용모를 이렇게 적었다. 몸집이 작고 얼굴이 대단찮았으며 옷은 낡고 검소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으나, 조정에 나아가 큰일을 결단할 때는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고.

그런데 후대는 이 사람에게 다른 옷을 입혔다. 태어날 때 큰 별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붙어 그 자리가 낙성대(落星垈)가 되었고, 여우로 둔갑한 요물을 꾸짖어 물리쳤다는 설화가 붙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강감찬은 대개 말 위에서 칼을 든 장수의 모습이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조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개경에 나성을 쌓자고 건의했다. 이겨놓고 방비를 말한 것이다. 나성은 1029년 완공됐고, 그는 2년 뒤 여든넷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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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 번의 대첩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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