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명령에 일단 따랐다가 마지막에 방향을 튼 경우다. 소집은 했고, 연행은 했고, 그러고 나서 풀어주었다. 그런데 아예 처음부터 응하지 않은 지서가 청원군에 둘 있었다. 가덕지서와 낭성지서다.
청주경찰서에서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이 두 지서는 소집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낭성지서장 노상도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의용소방대원에게 보도연맹원 명부를 불태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명부는 지서 앞 신작로에서 태워졌다. 그때 직접 명부를 태운 사람은 1929년생 최남현이고, 그의 증언이 이 일의 근거로 남아 있다.
명부를 태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양산 웅상의 오강환 편에서도 말했지만 다시 짚을 만하다. 그해 여름의 절차는 명부에서 시작됐다. 경찰 사찰계는 전쟁 전부터 사상범 관련 업무를 전담하며 보도연맹원을 갑을병 또는 ABC 등급으로 나눠 관리했고, 전쟁이 나자 곧바로 치안국 통첩에 따라 요시찰인을 구금했다. 그 모든 절차의 출발점이 명부였다. 종이가 사라지면 절차가 멈춘다.
물론 명부가 지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찰서에도 있고 상급 기관에도 사본이 있었다. 그래서 명부를 태우는 일은 절차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버는 일에 가깝다. 그런데 그해 여름에는 시간이 곧 생사였다. 낙동강 방어선 안쪽처럼 인민군이 끝내 들어오지 못한 지역에서는 학살이 8월까지 이어졌지만, 전선이 지나간 지역에서는 며칠만 버티면 상황 자체가 바뀌었다.
가덕지서장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조사 기록에 지서 이름만 남았다. 낭성면과 가덕면의 보도연맹원 가운데 몇 명이 이 일로 살아났는지도 집계된 적이 없다.
같은 청원군의 다른 면들은 사정이 달랐다. 부용면에서는 1차로 소집된 사람들이 분터골과 피반령에서, 2차 26명이 수리너머 고개에서 학살됐다. 오창면을 마을별로 전수 조사한 결과 18개 리에서만 199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 오창면의 인구 대비 희생자 비율은 2.3퍼센트였다.
같은 군, 같은 명령, 같은 달이었다. 어느 지서 관할에 살았느냐가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