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여름에 벌어진 일은 대체로 이렇게 요약된다. 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 있던 사람들을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전국에서 이들을 불러 모아 가두었다가 골짜기와 폐광과 바다에서 죽였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사건 발생을 확인한 곳만 당시 149개 시군 가운데 114개다. 남한 땅의 76퍼센트다. 공식 확인된 희생자는 4,934명이고 전체 추정치는 연구자에 따라 최소 6만에서 20만, 30만까지 벌어진다.
이 숫자 앞에서 우리는 보통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국가가 시켰고, 사람들은 따랐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자료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 문장이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남는다.
같은 여름, 같은 무전을 받고, 같은 명부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다르게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다.
제주 성산포에서는 경찰서장이 총살 집행을 의뢰하는 공문 위에 여섯 글자를 적어 돌려보냈다. 부당함으로 불이행. 전남 구례에서는 서장이 480명을 마당에 모아놓고 전원 방면했다. 경남 김해 한림에서는 면장이 창고에 갇힌 사람들 중 젊은 사람은 청년단에 가입시켜 빼내고 나이 든 사람은 뒷문으로 내보냈다. 충북 영동에서는 양조장 주인 부부가 감시하던 경찰들에게 닭 열아홉 마리와 술을 내어 재운 다음 창고 자물쇠를 뜯었다. 충북 청주에서는 지서장이 사람들을 산에 데려가 나무를 심게 하고는 하루 고생했으니 집에 가라고 돌려보냈다.
이 시리즈는 그런 자리 스물두 곳을 모은다. 스무 곳은 근거가 확인됐고, 두 곳은 아직 확인 중이다. 미담집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사람을 살린 자리를 보면 사람을 죽이는 절차가 보인다. 보도연맹원이 죽음에 이르는 길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었다. 명부를 만들고, 불러 모으고, 가두고, 트럭에 싣고, 쏘았다. 살린 사람들은 이 다섯 마디 가운데 정확히 어느 하나를 끊었다. 명부를 태운 사람, 소집에 응하지 않은 사람, 창고 문을 연 사람, 이송 중에 공포탄을 쏜 사람, 명령서 자체를 거부한 사람. 절차가 다섯 마디였다는 사실은 학살을 당한 쪽의 기록보다 학살을 멈춘 쪽의 기록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둘째, 이 이름들이 있어야 명령이라는 변명이 무너진다. 명령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흔하다. 그런데 같은 명령을 받은 사람 가운데 일부는 다르게 했다. 그 일이 가능했다는 것을 이 자리들이 증명한다. 어렵고 위험했으며 어떤 이는 목숨으로 값을 치렀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미리 밝혀 둘 것이 있다. 이들은 영웅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 그 체제의 관리였고, 며칠 전까지 같은 명부를 만들고 같은 사람들을 감시하던 이들이었다. 오강환은 일본군에 끌려갔던 이력 때문에 친일파 소리를 듣다 경찰이 됐고, 안종삼은 여순사건 이후 좌익이 강하다는 구례에서 서장을 하던 사람이다. 그들이 특별한 사상을 가져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남정식이 2007년에 남긴 말은 이렇다. 얼굴을 모두 알고 있던 순박한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적어 둔다. 스물두 자리를 모아 놓아도 그 여름은 여전히 학살의 여름이다. 이 시리즈의 각 편은 그 지역에서 실제로 벌어진 학살을 함께 적는다. 구례에서 480명이 살아난 같은 달, 구례 경찰이 트럭 두 대에 실어 담양으로 데려간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죽었다. 살린 이야기가 죽인 이야기를 덮게 두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