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용 — 공포탄을 쏘고 헌병에게 사살되다

1950 7월 · 충북 증평 용강리 공동묘지

이 시리즈에 실린 자리 가운데, 사람을 살린 값을 목숨으로 치른 것이 확인된 사람은 한 명이다.

충북 괴산군 증평면 양곡창고에는 일부 보도연맹원과 군경 가족이 함께 갇혀 있었다. 증평면 지서 주임 안대용은 이 가운데 군경 가족과 증평지부 간부 지 아무개를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기회는 이송 중에 왔다. 1950년 7월 9일, 양조장과 양곡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옥녀봉으로 옮겨지던 길이었다. 증평읍 용강리 공동묘지, 질벌뜰이라고 부르는 자리에서 안대용은 공포탄을 쏘며 튀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흩어졌다.

그가 원래 살리려던 것은 군경 가족과 간부 한 사람이었는데, 함께 실려 가던 용강리 보도연맹원들도 그 틈에 같이 풀려났다. 목표는 몇 사람이었으나 결과는 더 넓었다.

그리고 안대용은 이 일로 헌병에게 사살됐다.

이 시리즈의 다른 편들과 이 편을 나란히 놓으면 한 가지가 보인다. 사슬의 앞쪽 마디를 끊은 사람은 대체로 살아남았다. 명부를 태운 오강환도, 소집을 미룬 이섭진도 조사는 받았지만 목숨은 건졌다. 그런데 뒤쪽 마디로 갈수록 값이 비싸진다. 명부는 종이라서 태워도 나중에 없어졌다고 우길 수 있지만, 트럭에 실려 이송 중인 사람들은 이미 처형 절차에 들어간 몸이다. 그 단계에서 끊는다는 것은 집행을 눈앞에서 방해한다는 뜻이 된다.

안대용이 그 계산을 못 했을 리는 없다. 지서 주임이라면 이송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리다. 그는 가장 늦고 가장 위험한 마디에서 끊었다.

이 이야기는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613쪽에 몇 줄로 적혀 있다. 그의 나이도, 가족도, 어디에 묻혔는지도 그 몇 줄에는 없다. 옥녀봉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같은 지역 조사에 나와 있다.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2010년대 들어 괴산·증평·청원 지역에서 보도연맹 희생자 첫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안대용의 이름이 불렸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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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람을 살린 사람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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