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8일에 벌어진 이 일은 우연 하나가 사람 예순일곱 명을 살린 이야기다.
그날 청원군 현도면에서는 지서장 신 아무개가 상부 지시로 현도국민학교에 보도연맹원 70명을 모았다. 그는 그 가운데 3명을 골라 순경에게 상삼리 고갯마루에서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상부의 지시를 아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세 사람이 죽었다.
그러고 나서 신 지서장은 나머지에게 가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을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알아듣지 못했다. 청주경찰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 대목이 그해 여름의 무서운 점이다. 살리려는 말조차 한 번에 전달되지 않았다. 뒤에 나올 강외지서에서도 똑같은 오해가 일어나 다섯 사람이 죽는다.
현도 사람들이 남이면 소재지를 지날 때, 일행 중 하나가 말했다. 지서에 들러서 지서장님께 인사나 하고 가세. 남이지서장 안만근이 원래 현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는 사람이니 인사나 하자는, 아무 뜻 없는 한마디였다.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 안만근은 이들이 청주경찰서로 간다는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지금 청주로 가면 다 죽어. 얼른 도망가게.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면으로 되돌아갔다. 현도면 보도연맹원 70명 가운데 3명만 죽고 나머지가 살아났다.
이 일에는 문서 근거가 하나 남아 있다. 안승갑이 쓴 1950년 7월 8일 일기다. 보도연맹회원 청주 들어가던 중에 남이면에서 돌아오다. 짧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못 박는 한 줄이다.
현도면 사람들이 살아난 이유에 대해서는 그동안 세 가지 설이 있었다. 신 지서장이 살려주었다는 설, 안만근의 귀띔으로 살아났다는 설, 현도면 보도연맹원 오갑진이 소집에 응하지 말라고 했다는 설이다. 셋이 다 조금씩 작용했을 수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안만근의 역할이었다는 것이 조사자의 판단이다.
안만근은 이 일 말고도 한 번 더 나온다. 남이면에서 2차로 소집된 보도연맹원 약 100명이 양곡창고에 갇혔을 때, 문을 열어 준 사람도 그였다.
그의 선행은 이후 오래 역사에 묻혔다. 국군 수복 후에 찍은 남이지서 단체사진 앞줄 가운데에 앉은 사람이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