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모와 김대곤·김태곤 — 열쇠를 건네고 공포탄을 쏘다

1950 7월 · 충북 청주 오근장 통운창고

오근장은 원래 청원군 북일면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1928년 충북선이 뚫리고 오근장역이 생기면서 크게 자랐다. 기차역이 들어서면 외지 사람이 드나들고 새로운 소식과 사상도 함께 들어온다. 그래서 일개 리에 불과한 오근장에 보도연맹 가입자가 200명 가까이 있었다.

이들이 왜 가입했는지는 그 시절 농촌의 사정을 알면 짐작이 된다. 민주애국청년동맹이나 농민회 간부들이 여기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품앗이를 안 해 준다고 했다. 농사꾼에게 품앗이에서 빠진다는 말은 마을에서 배제된다는 말과 같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입한 조직이 나중에 국민보도연맹으로 자동 편입됐다.

1950년 여름, 마을 이장의 통보로 사람들이 지서에 모였다. 바쁜데 왜 오라 가라 하느냐고 입이 나온 채로였다. 그들은 지서장의 지시대로 기차역 인근 통운창고로 갔고, 그대로 갇혔다. 창고 안 사람들은 자기들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대부분 사회주의자도 좌익활동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있었다. 의용소방대장 김대곤과 그의 동생 김태곤이다. 아무 죄도 없는 마을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는 없는데, 하는 것이 그들의 고민이었다. 형제는 결국 오근장 파출소장 정원모에게 말을 꺼냈다. 지서장님, 보도연맹원들을 풀어 줍시다. 죄 없는 이들을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원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창고 열쇠를 내주었다. 형제는 그 침묵을 동의로 알아듣고 문을 열었다. 다들 집으로 가시오. 사람들은 젠장할, 바빠 죽겠는데, 하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흩어진 뒤 정원모가 하늘을 향해 공포탄을 쐈다. 상부의 추궁에 대비한 알리바이였다. 보도연맹원들이 창고 문을 부수고 탈출했는데 모두 놓쳤다고 보고하려고 미리 준비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역할이 겹쳐 있다. 말을 꺼낸 사람이 있고, 문을 연 사람이 있고, 뒤를 감당한 사람이 있다. 정원모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책임을 최소화하면서도 결정적인 것 하나를 내주었다. 그 침묵이 비겁이었는지 계산이었는지는 지금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열쇠는 그의 손에서 나왔고 공포탄도 그가 쐈다.

살아난 사람 가운데 도씨 성을 가진 이가 있었다. 그가 전쟁 후에 낳은 아들이 훗날 이름 있는 시인이 됐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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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람을 살린 사람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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