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경찰도 공무원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다.
충북 영동군 용산면에 양조장이 하나 있었다. 군수나 서장 같은 관내 기관장이 이 지역에 오면 들를 정도로 이름난 곳이었다. 주인은 서른아홉 살의 김노헌, 아내는 스물여섯 살의 김춘옥이었다.
1950년 여름, 마을 공동 가마니창고에 보도연맹원 50여 명이 갇혔다. 죽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지서 경찰들이 창고를 지키고 있었다.
김노헌이 쓴 방법은 그의 직업에서 나왔다. 그는 용산지서 경찰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술을 냈다. 아내 김춘옥이 서둘러 닭 열아홉 마리를 잡아 상을 차렸다. 양조장 주인이 내는 술이니 모자랄 리 없었다. 경찰들은 헛소리를 할 정도로 취해 잠들었다.
취한 것을 확인한 김노헌은 창고로 갔다. 드라이버로 자물쇠 경첩을 분해했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빨리 도망가게. 여기 있다가는 모두 끌려가서 죽어.
사람들을 내보낸 뒤에 그가 한 일이 중요하다. 창고의 창문을 뜯어 놓고 출입문은 다시 못질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창문을 뜯고 스스로 탈출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다음 날 술에서 깬 경찰들이 무엇을 보게 될지까지 계산한 셈이다.
이 이야기는 오래 묻혀 있다가 아내 김춘옥이 여든여섯의 나이에 증언하면서 세상에 나왔다. 김노헌은 196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이 일은 남편이 죽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기록이 됐다.
같은 영동군의 다른 자리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이 마을에서 50여 명이 살아난 그 여름, 영동군 전체에서는 300명에서 5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동군 용산면 보도연맹 서기였던 사람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영동군연맹 부장급 세 사람이 면내로 들어와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 심사를 했는데, 심사라는 것이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리며 과거의 죄목을 물은 뒤 조서를 꾸미는 형식이었다고.
경찰이 아닌 사람이 이 사슬에 개입하려면 방법이 달라야 했다. 명부를 태울 수도, 창고 열쇠를 건네받을 수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술과 닭과 손재주였다. 그것으로 마디 하나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