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에는 지금도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 세운 날짜는 1952년 11월 11일이고 세운 사람은 마을 주민들이다. 사건이 있고 2년 만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기 돈을 걷어 세웠다.
1950년 7월, 영동 일대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처형되고 있었다. 영동경찰서와 특무대 영동 파견대는 용화지서에도 관내 보도연맹원을 소집해 영동경찰서로 이송하라고 지시했다. 이섭진은 소집은 했지만 보내지 않았다. 약 40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다음이 이 사람의 방식이다. 영동경찰서 사찰과와 특무대에서 빨리 보내라는 독촉 전화가 계속 걸려 왔다.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미뤘다. 감금 장소가 허술해서 도망쳐 버렸다고 허위 보고했다는 증언도 있다.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시간을 끄는 방식이었는데, 그 여름에는 며칠을 버는 것이 곧 목숨이었다.
문제는 그 뒤에 생겼다. 1950년 9월 26일 영동이 수복되고 그가 지서로 돌아오자 감사 인사를 하러 오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환영대회를 열었고, 용화리의 강일선이 주도해 공적비를 세웠다.
그러자 특무대가 그를 불렀다. 좌익분자들을 살려줬는데 왜 비석이 세워졌는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이섭진은 연행돼 조사를 받았고, 일부러 살려준 것이 아니라고 해명한 뒤에야 풀려났다. 그러고도 영동경찰서와 특무대로부터 퇴직할 때까지 감시를 받았다.
이 대목이 이 시리즈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사람을 살린 행위는 그 사회에서 곧바로 미담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혐의가 됐다. 살린 사람과 살아난 사람이 서로를 감싸면 그것 자체가 사상의 증거로 읽히던 시절이었다.
같은 영동군 안에서도 사정은 갈렸다. 용화면에서는 40여 명이 살아났지만 영동군 전체의 보도연맹 희생자는 300명에서 5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지서 하나가 지킬 수 있는 범위는 그 면 하나였다.
비석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이 시리즈에서 물증이 남은 자리는 문형순의 명령서, 허임상의 공덕비, 그리고 이 영세불망비 정도다. 종이가 아니라 돌에 새겨졌다는 점에서 이 비석은 조금 특별하다. 살아난 사람들이 직접, 아직 위험이 다 가시지 않은 시점에 세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