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사슬에서 가장 앞에 있는 마디는 명부다. 명부가 없으면 소집이 없고, 소집이 없으면 구금이 없다. 양산 웅상면 지서 주임 오강환은 그 첫 마디를 끊었다.
1950년 여름 양산경찰서에서 웅상면 보도연맹원 300여 명을 소집해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웅상은 관내에 빨치산이 자주 나타나던 곳이라, 좌익 활동을 한 적 없는 사람까지 빨갱이로 몰려 경찰의 관리 대상에 올라 있었다. 오강환이 보기에는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명부를 파기하도록 지시했다.
양산경찰서 사찰주임이 전화를 걸어 보도연맹원을 소집해 보내라고 하자 그가 한 대답이 전한다. 서창 사람들 하나라도 끌고 가면 너는 나한테 죽는다. 서창은 웅상면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결과는 숫자로 남았다. 양산시향토사연구회가 양산군 전 지역의 보도연맹 희생자를 조사했더니 웅상면 희생자는 단 4명이었다. 다른 면들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적은 수다. 같은 양산군의 동면 사송리 사배재와 여락리 남락고개에서는 집단 희생이 확인됐고, 양산 전체 희생자는 500명에서 1,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이 사람의 이력에는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2001년, 아흔둘의 나이에 그를 만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대학 재학 중 일본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제대했다. 그런데 일자리를 구하려니 본의 아닌 일본군 경력 때문에 친일파라는 딱지가 붙어 취직이 되지 않았고, 그래서 경찰이 됐다고 했다. 아흔둘에도 목소리가 청년 같았다고 인터뷰한 사람이 적어 두었다.
그러니까 그는 이념 때문에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념의 딱지가 어떻게 사람을 옭아매는지를 자기 몸으로 겪은 사람이었다. 무고한 사람이 명단에 오르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았던 셈이다.
한 가지는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라고 적어 둔다. 명령 불복종으로 계엄사령부에 연행돼 사형이 확정됐다가, 당시 부산 계엄사령관이 일제강점기에 같은 부대에 있었던 인연을 알아보고 구명에 나서 풀려났다는 이야기가 지역에 전해진다. 극적인 대목이지만 지금까지 확인되는 것은 지역 기록과 후속 취재 수준이다. 이 시리즈는 확인된 곳까지만 확정으로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