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삼 — 구례경찰서 마당의 480명

1950 7월 · 전남 구례경찰서

전남 구례는 어려운 곳이었다. 1948년 여순사건의 영향을 정면으로 받은 지역이라 좌익 세력이 전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을 듣던 군이다. 그 말은 뒤집으면, 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950년 7월 22일 인민군이 들어왔다. 후퇴하기 전에 구금 중인 보도연맹원을 처형하고 물러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런 명령이 그해 여름 전국에 내려갔고,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대로 집행됐다.

구례경찰서장 안종삼은 그 며칠 동안 군내 유지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7월 24일, 유치장과 상무관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경찰서 마당으로 모두 불러냈다. 480명이었다. 원래 구례의 보도연맹원은 800여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좌익색이 짙다고 다시 분류된 사람들이 이들이었다. 다시 말해 가장 위험하다고 표시된 쪽이다.

그가 마당에서 한 말은 이렇게 전한다. 과거의 모든 죄과는 용서하기로 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모두 방면합니다. 국가를 위해 다시 한 번 애국의 기회를 드릴 테니 나라에 충성하십시오. 다른 기록에는 자기가 반역으로 몰려 죽는다면 그 혼이 480명 각자의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사람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전원을 내보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참 뒤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가 한창이던 2009년에야 알려졌고, 조사 과정에서 당시 경찰 관계자들의 진술이 서로 일치했으며 1975년 전남일보가 낸 광복 30년사에도 정황이 기록돼 있었다. 2012년 구례경찰서 앞에 그의 동상이 섰다.

안종삼 본인의 뒷일은 나쁘지 않았다. 군민들의 인심을 얻어 구례 지역 2대 도의원으로 선출됐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값을 거의 치르지 않은 드문 축에 든다.

다만 구례가 통째로 살아남았다고 읽으면 안 된다. 안종삼이 480명을 방면한 것과 별개로, 구례 경찰이 연행한 주민들을 화물차 두 대에 싣고 광주교도소로 이송하던 중 담양 대덕터널 서쪽 옥천나들 골짜기에서 학살한 사실이 따로 확인됐고 현장도 발굴됐다. 한 사람의 결단이 한 군을 다 덮지는 못한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손이 닿는 범위까지가 그가 지킬 수 있는 전부였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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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람을 살린 사람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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