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봉기를 한 번 일으키고 잡히는 사람은 많다. 네 번 일으킨 사람은 이 사람뿐이다.
어떤 사람인가
1825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 집안이다.
무과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벼슬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름을 여러 번 바꿨다. 이필제 외에 진천에서는 다른 이름을, 진주에서는 또 다른 이름을 썼다. 기록에 나오는 그의 이름만 여러 개다.
한 곳에서 실패하면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
네 번
1869년, 충청도 진천에서 봉기를 준비하다 발각되었다. 그는 도망쳤다.
1870년, 경상도 진주에서 다시 준비하다 또 발각되었다. 또 도망쳤다.
1871년 3월, 경상도 영해에서 실제로 봉기가 일어났다.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관아를 점령했다. 부사가 죽었다.
이 봉기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 동학 조직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동학과의 관계
그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찾아가 함께하기를 청했다.
명분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자는 것이었다. 최제우는 1864년에 처형되었다.
최시형은 처음에 거절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필제가 거듭 설득했고, 결국 지역 동학 조직이 참여했다.
영해 봉기는 며칠 만에 진압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동학은 큰 타격을 입었다. 많은 교인이 잡혀 죽었고 최시형은 오래 쫓기게 되었다.
동학에서는 이 사건을 오랫동안 무겁게 다뤘다.
네 번째
영해에서 도망친 그는 그해 8월 문경 초곡에서 다시 봉기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실행 전에 잡혔다.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그해 12월 처형되었다. 마흔여섯이었다.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한쪽에서는 조선 후기 민중 봉기의 흐름을 잇는 인물로 본다. 홍경래에서 임술민란을 거쳐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그가 있다.
다른 쪽에서는 그가 각지의 불만을 이용해 자기 뜻을 이루려 한 인물이며, 특히 영해에서 동학 조직을 끌어들여 큰 피해를 입혔다고 본다.
동학 쪽 기록은 대체로 후자에 가깝다.
확실한 것
그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새 왕조를 세우려 했다는 진술도 있고, 중국으로 가려 했다는 진술도 있다. 국문 기록에 나오는 그의 말은 일관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남는다.
그는 세 번 실패하고도 네 번째를 시도했다. 이름을 바꿔가며, 지역을 옮겨가며, 매번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가며.
그 집요함이 무엇에서 나왔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