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 — 죽었는데 살아 있다는 소문이 오래 갔다

1812 4월 19일 · 정주성(평안도)

1811년 12월, 평안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왜 평안도였나

조선에서 평안도는 오래 차별받았다.

과거에 급제해도 높은 자리에 오르기 어려웠다. 서북 사람은 청요직에 쓰지 않는다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가난하지 않았다. 청과의 무역로에 있어 상업이 발달했고 광산도 있었다. 돈은 있는데 자리가 없는 상태였다.

그 위에 세도정치가 겹쳤다. 안동 김씨 등 몇 집안이 권력을 나눠 갖고, 수령 자리가 사고팔리고, 그 돈이 세금으로 백성에게서 나왔다.

1809년부터 흉년이 이어졌다.

누가 모였나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사람이다. 몰락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다.

그와 함께한 사람들의 면면이 이 봉기의 성격을 보여준다.

우군칙은 풍수를 보는 사람이었다. 이희저는 광산과 상업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이다. 김창시는 진사였다. 홍총각과 이제초는 힘이 센 장사였다.

지식인과 상인과 무사와 술사가 함께 모였다.

그리고 실제 병력은 광산 노동자와 임금을 받는 일꾼들로 채워졌다. 광산을 연다고 사람을 모은 뒤 그들을 군사로 삼았다.

넉 달

처음에는 빠르게 퍼졌다.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 여러 고을을 차지했다.

그러나 곧 관군이 반격했다. 봉기군은 정주성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넉 달을 버텼다.

1812년 4월, 관군이 성 밑으로 굴을 파고 화약을 터뜨려 성벽을 무너뜨렸다.

홍경래는 그 싸움에서 죽었다.

성 안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남자 1,900명 남짓이 처형되었다.

죽지 않았다는 소문

그가 죽은 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다른 사람이 대신 죽었고 그는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오래갔다. 수십 년 뒤의 기록에도 나온다.

그리고 이후 여러 봉기에서 홍경래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홍경래가 다시 나타났다거나, 그의 명을 받았다는 식이다.

1862년 임술민란 때도, 그 뒤의 여러 사건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왜 그랬을까

앞서 장길산 편에서 본 것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장길산은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되었다. 홍경래는 분명히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것이 되었다.

사람들이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랐다는 뜻이다.

봉기는 실패했고 이천 명 가까이가 죽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된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문제가 남아 있는 한, 그 문제를 향해 일어섰던 사람의 이름도 남는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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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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