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8년에 태어났다. 정약용의 형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형제가 함께 유배되었다. 동생은 강진으로, 형은 흑산도로 갔다.
두 사람은 나주 율정점에서 헤어졌고, 다시 만나지 못했다.
섬에서
흑산도는 육지에서 멀다. 유배지 가운데서도 험한 곳으로 꼽혔다.
그는 그곳에서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섬사람들과 어울렸다.
동생이 강진에서 책을 쓰는 동안, 형은 바다를 들여다보았다.
자산어보
1814년에 완성한 것이 『자산어보』다. 자산은 흑산의 다른 이름이다.
바다 생물 155종 남짓을 정리한 책이다. 물고기와 조개와 해초를 나누고, 각각의 생김새와 습성과 맛과 쓰임을 적었다.
특징이 있다. 그는 책에서 본 것을 옮기지 않았다.
직접 잡아 보고 갈라 보고 먹어 보고 적었다. 어부들에게 물어 그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을 함께 실었다.
어떤 물고기에 대해서는 배를 갈랐더니 무엇이 나왔다고 적었고, 어떤 것은 맛이 어떠하며 어떻게 먹는 것이 좋다고 적었다.
조선의 학문이 대체로 문헌을 다루는 것이었던 시대에, 이것은 다른 방식이다.
장창대
이 책의 서문에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섬에 사는 장덕순, 자는 창대라는 사람이다.
정약전은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집이 가난해 책은 많이 읽지 못했으나 성품이 차분하고 정밀해, 초목과 물고기와 새 가운데 눈과 귀로 접한 것은 모두 자세히 살피고 깊이 생각해 그 성질과 이치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불러 함께 지내며 연구하고 책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양반 유배객이 섬 청년을 공동 연구자로 밝혀 적은 것이다. 조선의 책에서 흔한 일이 아니다.
『자산어보』에 실린 지식의 상당 부분은 이 사람에게서 왔을 것이다.
돌아가지 못했다
뒤에 그는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옮겼다.
동생이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올 때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동생은 오지 못했다. 정약용의 해배는 1818년이다.
정약전은 1816년 우이도에서 죽었다.
정약용이 형의 부고를 듣고 쓴 글이 남아 있다. 그는 형을 두고, 자기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났으며 자신의 학문을 알아준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취지로 썼다.
남는 것
『자산어보』는 오래도록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동생의 저작들이 방대하고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책의 가치는 다르게 평가된다. 19세기 초 한반도 연안 생태를 기록한 자료로서, 그리고 관찰과 기록의 방법으로서다.
유배는 벌이다. 그런데 그 벌이 없었다면 이 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