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는 조선의 무예를 그림과 함께 정리한 책이다. 1790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되었다.
이 책을 만든 사람은 셋이다. 이덕무, 박제가, 그리고 백동수다.
앞의 두 사람은 문헌을 맡았고, 백동수는 실기를 맡았다.
서얼
1743년에 태어났다. 무반 집안인데 서얼이었다.
조선에서 서얼은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오를 수 있는 자리에 한계가 있었다. 앞서 허균이 「유재론」에서 문제 삼은 바로 그 벽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고도 오래 벼슬을 얻지 못했다.
야뇌
그의 호는 야뇌(野餒)다. 들에서 굶주린다는 뜻이다.
이덕무가 이 호에 대해 쓴 글이 남아 있다.
사람들이 그를 촌스럽고 굶주린 사람이라 비웃자, 백동수가 그것을 오히려 자기 호로 삼았다는 것이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는 태도였다.
이덕무는 그 글에서 백동수를 두고,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썼다.
기린협
한때 그는 서울을 떠나 강원도 인제의 기린협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박지원이 그를 보내며 쓴 글이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문」이다.
박지원은 그 글에서, 재주 있는 사람이 세상에 쓰이지 못해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무예도보통지
1790년, 정조가 무예서 편찬을 명했다.
백동수가 맡은 일은 책상 앞의 일이 아니었다. 옛 책에 적힌 동작을 실제로 해보고, 되는지 안 되는지를 확인하고, 그림으로 옮길 수 있게 만드는 일이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스물네 가지 무예가 실려 있다. 창과 칼과 맨손 기술이 동작별로 그려져 있다.
한문본과 함께 한글본도 만들어졌다. 글을 모르는 군사들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가 그것이다. 무예를 아는 사람만의 것으로 두지 않고 누구나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
그 뒤
책이 나온 뒤 그는 여러 지방의 무관직을 지냈다.
1816년에 죽었다.
그와 어울린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 이 사람의 자리가 보인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박지원.
북학파라 불리는 이들 가운데 여럿이 서얼이었다.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서얼을 등용하면서 이들이 모였다.
백동수는 그 무리에서 유일하게 몸을 쓰는 사람이었다.
글을 쓰는 서얼들과 몸을 쓰는 서얼이 함께 만든 책이 『무예도보통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