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남양주 마재에서 태어났다. 남인 집안이었고, 이익의 저술을 읽으며 학문의 방향을 잡았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에서 일했고, 수원 화성 축조 때 거중기를 설계했다. 이 시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순탄한 때였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상황이 뒤집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셋째 형 정약종은 처형됐고, 둘째 형 정약전과 그는 유배됐다. 그는 경상도 장기로 갔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조사받은 뒤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됐다.
강진에서 열여덟 해를 살았다. 처음에는 주막집 뒷방에 머물렀고 나중에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5백 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1818년 해배되어 고향 마재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열여덟 해를 더 살다 죽었다.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썼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핵심 사상
정약용의 사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은 권력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탕론에서 그는 이렇게 묻는다. 통치자는 위에서 내려온 것인가. 그의 답은 반대다. 마을 사람들이 필요해서 이장을 세우고, 이장들이 모여 그 위를 세우고, 그렇게 올라가 임금에 이른다. 권력은 아래에서 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이 따라온다. 아래에서 세운 것이므로 아래에서 바꿀 수도 있다. 그는 탕왕이 걸왕을 몰아낸 일을 정당한 것으로 옹호했다.
원목에서도 같은 논리를 폈다. 목민관은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목민심서의 제목이 여기서 나온다.
토지에 대해서는 여전론을 냈다. 마을 단위(여)로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함께 경작한 뒤 노동량에 따라 나누자는 구상이다. 이는 유형원의 균전론이나 이익의 한전론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다만 그는 후에 정전제를 응용한 현실적 방안으로 물러섰다.
그가 남긴 일표이서 — 경세유표(국가 제도 개혁), 목민심서(지방 행정), 흠흠신서(형사 사법) — 는 국가 운영의 전 영역을 다시 짠 설계도다.
당대의 역할
역설적이게도 그의 저술 대부분은 유배지에서 나왔다. 관직에 있었다면 쓰지 못했을 것들이다.
강진에서 그는 밑바닥을 보았다. 목민심서에 나오는 지방 관리의 수탈 사례들은 관념이 아니라 목격이다. 애절양은 군포를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생식기를 자른 남자의 이야기를 기록한 시다. 그는 그 일이 실제로 갈밭마을에서 일어난 것을 보고 들었다고 적었다.
중앙에서 밀려난 것이 그를 사상가로 만들었다. 조선 실학의 상당 부분이 정치적 패배자의 자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그의 저술은 생전에 간행되지 못했다. 여유당전서가 정리되어 나온 것은 1930년대다.
논쟁
정약용을 근대 사상가로 읽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탕론의 논리는 분명 급진적이지만, 그가 왕정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의 구상은 더 나은 왕정, 더 잘 작동하는 관료제였다. 백성이 통치자를 직접 선출한다는 발상은 없다.
신분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노비제의 폐단을 비판했지만 전면 철폐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여전론에서도 신분에 따른 역할 구분이 남아 있다.
천주교 문제도 논쟁적이다. 젊은 시절 서학을 접하고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나, 이후 배교했는지 신앙을 유지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그가 남긴 기록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이런 유보가 그의 성취를 줄이지는 않는다. 권력의 정당성을 하늘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에서 찾은 것, 그것을 유학의 언어로 논증한 것은 동아시아 정치사상에서 드문 시도다.
오늘 읽기
권력은 어디서 오는가. 정약용의 답은 아래에서 온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 결론에 이른 것은 서양의 사회계약론을 읽어서가 아니다. 유학의 경전을 다시 읽고, 유배지에서 백성의 삶을 직접 보고, 그 둘을 맞춰본 결과였다.
그리고 이 결론을 그는 아무 권력도 없는 유배지에서 썼다. 관직도 없고 발표할 지면도 없이, 읽어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채로 5백 권을 썼다. 그 글이 실제로 읽히기 시작한 것은 백 년이 더 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