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회화에서 김홍도와 나란히 놓이는 이름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몇 줄이 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것
1758년에 태어났다. 몰년은 모른다.
아버지 신한평도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러니까 화원 집안이다.
그 자신도 도화서 화원이었고 첨절제사라는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호는 혜원이다.
여기까지가 사실상 전부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구와 사귀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는 자료가 없다.
김홍도에게는 스승 강세황이 쓴 글이 있고 여러 문인들이 남긴 언급이 있다. 신윤복에게는 그런 것이 거의 없다.
그림은 많다
반면 그림은 상당히 남아 있다.
『혜원전신첩』에 실린 서른 점 남짓이 대표작이다. 지금 간송미술관에 있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네 타는 여인들과 그것을 훔쳐보는 승려, 기방의 풍경, 달밤에 만나는 남녀, 술자리.
김홍도의 풍속화가 일하는 사람들을 그렸다면, 신윤복은 노는 사람들과 남녀 사이를 그렸다.
그리고 색을 썼다. 김홍도가 먹선 위주였던 것과 달리 붉은색과 푸른색을 과감하게 넣었다.
배경도 다르다. 인물만 놓는 대신 담장과 나무와 건물을 그려 넣어 장면을 만들었다.
여성설
2000년대에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이야기가 크게 퍼졌다.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였다.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다.
조선 시대 기록은 그를 남성 화원으로 적고 있다. 도화서 화원이라는 것, 벼슬을 지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여성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것은 역사 해석이 아니라 창작이다.
왜 그런 상상이 가능했나
다만 왜 그런 상상이 가능했는가는 물어볼 만하다.
첫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빈칸이 크면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다. 앞서 양만춘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강감찬에게 별을 떨어뜨린 것과 같은 자리다.
둘째, 그림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여성이 자주 등장하고, 그 시선이 당시 다른 화가들과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여성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이것을 화가의 성별로 연결하는 것은 비약이다. 화원은 주문에 따라 그리는 직업이었고, 무엇을 그리느냐가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셋째,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뛰어난 여성 화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바람이 빈칸을 채웠다.
남는 것
이 사전에서 신윤복은 특이한 자리에 있다.
대부분의 인물은 기록이 있는데 알 수 없어서 실렸다. 신윤복은 기록이 없어서 실렸다.
그리고 그 빈칸에 우리 시대가 무엇을 채워 넣었는지가 이 편의 내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