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회화에서 가장 큰 이름이다. 그런데 이 사람도 언제 죽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이었나
1745년에 태어났다. 중인 집안이다.
어려서 강세황에게 배웠다. 강세황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으로 꼽히던 문인이다. 그가 김홍도의 재주를 알아보고 가르쳤고, 뒤에 도화서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스무 살 무렵 이미 궁중 화원으로 일했다.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 시절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참여했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는 총애가 각별했다. 정조는 그림에 관한 일이면 김홍도에게 맡겼다고 할 정도였다.
무엇을 그렸나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풍속화다.
씨름하는 사람들, 서당에서 우는 아이, 빨래하는 여자들, 대장간, 논갈이.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의 특징은 배경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인물만 그려놓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로 화면을 채운다.
다만 그가 풍속화만 그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대에 더 높이 평가받은 것은 산수화와 신선 그림이었다.
금강산 일대를 그려 오라는 정조의 명을 받아 다녀왔고, 그때 그린 그림들이 남아 있다.
벼슬
1791년 정조의 어진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이 되었다.
화원이 지방관이 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런데 3년 만에 파직된다. 사냥을 다니고 백성을 함부로 다뤘다는 것이 이유로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다. 화원 출신이 수령이 된 것에 대한 반발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지적된다.
흐려지는 기록
1800년에 정조가 죽는다.
그 뒤 김홍도에 대한 기록이 급격히 줄어든다.
1805년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몸이 아프고 형편이 어렵다는 내용이다. 아들의 수업료를 보내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는 대목이 있다.
그 편지 이후로 그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무덤도 확인되지 않았다.
신선 같았다는 말
조희룡이 쓴 글에 그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있다.
풍채가 아름답고 도량이 넓어 사람들이 신선 같다고 여겼다는 취지다.
그가 신선 그림을 잘 그린 것과 겹쳐 이런 인상이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남은 것은 신선의 모습이 아니라 아들의 수업료를 걱정하는 편지 한 장이다.
앞 편의 최북과 나란히 놓으면 대비가 분명하다. 최북은 권력의 요구를 거절하다 눈을 찔렀고, 김홍도는 왕의 총애를 받으며 그렸다.
그런데 둘 다 마지막이 기록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