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두 여성이다. 그리고 둘 다 조선왕조실록에 없다.
논개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두 번째 싸움이었다.
성 안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다. 일본군이 촉석루에서 승전 잔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한 여자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처음 문헌에 나오는 것은 1621년 유몽인의 『어우야담』이다. 사건으로부터 28년 뒤다.
유몽인은 그를 진주의 관기라고 적었다. 그리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왜장을 껴안아 함께 떨어졌다고 썼다.
계월향
같은 전쟁의 다른 이야기다.
평양성이 일본군에게 넘어가 있을 때, 계월향이라는 평양 기생이 적장의 눈에 들어 곁에 있게 되었다.
그가 조선 장수 김응서를 오라비라 속여 성 안으로 들여보냈고, 김응서가 잠든 적장의 목을 벴다.
두 사람이 함께 빠져나오려다 어렵게 되자, 계월향이 자신을 두고 가라고 했고 김응서가 그를 죽이고 혼자 나왔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형태다.
이 이야기 역시 조선 후기 문헌을 통해 전한다. 정사에는 없다.
왜 없을까
두 사람 모두 기생 신분이다.
조선의 공식 기록은 이런 신분의 인물을 잘 남기지 않았다. 열녀나 효자로 표창되는 경우가 아니면 이름이 실릴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두 이야기 모두 성이 함락된 뒤, 곧 진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다.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패배 속의 이야기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뒤에 붙은 것
논개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부터 논란이 있었다.
관기가 아니라 최경회라는 관리의 부실이었다는 주장이 나왔고, 지금도 이 문제는 정리되지 않았다.
이 주장이 나온 배경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기생 신분으로는 정식으로 기릴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고,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려면 신분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1740년에 진주에 의기사가 세워졌다. 나라에서 그를 의로운 기생으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무엇이 남았나
두 이야기 모두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이 있다. 1593년 진주성에서 육만 명 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 평양성이 함락되어 있었다는 것.
그 참혹한 자리에서 사람들이 기억하기로 선택한 것이 두 여자의 이야기였다.
공식 기록이 남기지 않은 사람을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해서 남겼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그렇게 기억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