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 스물아홉에 옥에서 죽다

1596 8월 · 담양 · 한양

1567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스물여섯이었다.

어머니 상중이라 처음에는 나서지 않았다. 담양에서 의병이 모일 때 형이 먼저 나갔다가 죽었다.

1593년, 그가 나섰다. 조정이 그의 부대에 충용군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힘이 세다는 이야기

이 사람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힘에 관한 것이다.

어릴 때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이야기, 나무를 뿌리째 뽑았다는 이야기, 담을 뛰어넘고 지붕을 밟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여러 지역에 남아 있다.

말을 타고 달리며 두 자루 칼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이야기가 많다는 것 자체가 이 사람이 어떻게 기억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싸울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그가 큰 전투를 치른 기록은 많지 않다.

그가 나선 1593년 무렵은 전선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때였다.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정은 그의 부대를 여러 곳에 배치했으나 실제 교전은 제한적이었다.

그를 두려워한 것은 오히려 안쪽이었다. 힘이 세고 인망이 있는 젊은 의병장은 그 자체로 경계 대상이었다.

1596년

충청도에서 이몽학이 난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사람들을 모으면서 김덕령과 곽재우 등이 자기와 함께한다고 퍼뜨렸다. 실제로 그런 관계는 없었다.

난은 곧 진압되었다. 그런데 그 뒤 국문 과정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나왔다.

그는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갔다.

스무 날 남짓 국문이 이어졌다. 여섯 차례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옥에서 죽었다. 스물아홉이었다.

선조실록은 그가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정강이뼈가 부러졌다는 기록도 있다.

같은 사건에 연루되었던 곽재우는 풀려났다.

남긴 노래

옥에서 지었다는 시조가 전한다. 「춘산곡」이라 불린다.

봄 산에 불이 나 다 타지 못한 풀을 태우는데, 저 산에는 물이라도 있어 끌 수 있지만 내 몸의 연기 없는 불은 끌 물이 없다는 내용이다.

억울함을 말한 것이다.

그 뒤

그가 죽은 뒤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라를 위해 일어선 사람이 그렇게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1661년, 현종 대에 그의 억울함이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죽은 지 65년 뒤다. 뒤에 충장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에 그의 시호를 딴 충장로가 있다.

한 가지 남는 대목

이 사람의 이야기에서 힘이 세다는 전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실제로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말할 근거가 부족하다.

그 빈자리를 사람들이 힘에 관한 이야기로 채웠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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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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