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열흘 남짓 되었을 때였다.
경상도 의령에서 한 사람이 사재를 털어 사람을 모았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이다.
붉은 옷
그는 붉은 옷을 입고 싸웠다. 그래서 홍의장군이라 불렸다.
눈에 잘 띄는 옷을 입는 것은 전장에서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일부러 그렇게 했다.
같은 붉은 옷을 여러 부하에게 입혀 여러 곳에 나타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적이 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부대는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았다. 지형을 이용해 매복했고, 밤에 기습했고, 강을 건너는 지점을 노렸다.
1592년 5월 정암진에서 낙동강을 건너려던 일본군을 막았다. 이 싸움으로 전라도로 들어가려던 길이 끊겼다.
관군과의 마찰
그의 활동은 조정과 충돌하기도 했다.
경상감사 김수와 심하게 대립했다. 곽재우는 김수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공격했고, 김수 쪽은 곽재우가 관의 물자를 함부로 썼다고 했다.
한때 곽재우가 역심을 품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조정이 조사에 나섰고, 김성일 등이 중재해 정리되었다.
의병이 관의 통제 밖에 있다는 것 자체가 조정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전후에 그는 여러 차례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거의 매번 사양하거나 곧 물러났다.
1608년 무렵부터는 비슬산과 낙동강가에 은거했다.
그가 한 것이 벽곡이다. 곡식을 끊고 솔잎이나 대추 같은 것만 먹는 도교 수련법이다.
실제로 그가 곡기를 끊고 지냈다는 기록이 여럿 있다. 광해군이 사람을 보내 음식을 권했다는 기록도 있다.
1617년에 죽었다.
왜 그랬을까
이 대목이 이 사람을 이 사전에 넣는 이유다.
전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가장 앞에서 싸운 사람이, 전쟁이 끝나자 벼슬을 마다하고 곡기를 끊었다.
몇 가지 사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의병장들의 처지가 전후에 좋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볼 김덕령은 옥에서 죽었다. 의병을 이끌었다는 것 자체가 의심의 근거가 되던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광해군 대의 정치 상황도 있었다. 그는 인목대비 폐위 논의가 진행되던 시기에 물러나 있었다.
다만 그가 왜 그랬는지를 직접 말한 기록은 없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말했다. 앞서 최치원에게 붙였던 것과 같은 말이다.
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자리를 버린 사람에게, 이 나라 사람들은 늘 그 이름을 붙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