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씨를 가져온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기록에 남은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목화를 보고 그 씨를 가져오려 했다. 그런데 원에서 목화씨 반출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붓두껍 속에 씨앗을 숨겨 국경을 넘었다.
이것이 교과서와 위인전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기록에 있는 것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와 고려사에는 붓두껍이 나오지 않는다.
실록은 그가 원에 갔다가 돌아올 때 목면 종자를 얻어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고 적었다. 숨겼다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었다는 언급도 없다.
붓두껍 이야기가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후기 이후다. 그리고 근대 교과서를 통해 널리 퍼졌다.
반출 금지 자체에 대해서도 확인할 만한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 당시 원의 영역에서 목화는 이미 널리 재배되고 있었고, 씨앗을 국가가 통제했다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어려웠던 것은 다른 대목
그러면 이 일이 쉬웠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진짜 어려운 부분은 씨앗을 가져온 다음이었다.
문익점은 씨앗을 장인 정천익과 나누어 심었다. 문익점이 심은 것은 거의 다 죽고 정천익이 심은 것 중 한 그루가 살아남았다. 3년을 길러 씨를 늘렸다.
그런데 목화는 심는다고 옷이 되지 않는다. 씨를 빼고 실을 뽑고 천을 짜는 도구와 기술이 있어야 한다.
실록은 이 대목을 이렇게 적었다. 정천익의 집에 원의 승려 홍원이 머물게 되었는데, 그가 목화를 보고 실 뽑는 도구와 베 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정천익이 그것을 익혀 집안 사람들에게 전하고 마을에 퍼뜨렸다.
그러니까 이 일은 한 사람의 공이 아니다. 씨를 가져온 사람, 그것을 살려낸 사람, 만드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각각 있었다.
무엇이 바뀌었나
목화가 들어오기 전 보통 사람들의 겨울옷은 삼베나 모시였다. 안에 갈대나 짚 같은 것을 넣기도 했다. 비단은 극소수만 입었다.
무명이 퍼지면서 겨울을 나는 방식이 달라졌다. 옷만이 아니라 이불도 바뀌었다.
조선에서 무명은 옷감이면서 동시에 화폐 구실도 했다. 세금으로 걷혔고 물건값으로 쓰였다.
한 사람의 여행이 이렇게 큰 변화로 이어진 경우는 흔치 않다.
왜 붓두껍이 붙었을까
짐작해볼 만한 이유가 있다.
주머니에 씨앗을 넣어 왔다는 것은 너무 평범하다. 이만큼 큰 변화를 만든 일에는 그만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사람들이 느꼈을 것이다.
금지된 것을 몰래 가져왔다는 구조는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든다. 위험이 있어야 공이 커진다.
앞서 양만춘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강감찬에게 별을 떨어뜨린 것과 같은 일이 여기서도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