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 — 신채호가 천 년 제일의 사건이라 부른 일

1135 1월 · 서경(평양)

서경의 승려다. 그리고 그가 일으킨 일을 두고 20세기의 역사가 하나가 우리 역사 천 년래 제일 큰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가 주장한 것

인종 때 고려는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탔고, 북쪽에서는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커져 고려에 사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묘청이 나섰다. 개경은 이미 기운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게 했고, 그곳에 왕이 머물면 천하가 복종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갔다. 임금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자고 했다. 금나라를 치자고도 했다.

인종이 한동안 이 말을 들었다. 실제로 서경에 대화궁이 세워졌고 왕이 여러 차례 서경으로 갔다.

반대편

개경의 문벌 귀족들이 반대했다. 김부식이 중심이었다.

반대 논리는 이랬다. 금나라를 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도읍을 옮기는 것은 나라를 흔드는 일이다. 풍수와 도참으로 국가 대사를 정할 수 없다.

실제로 묘청 쪽의 근거는 상당 부분 풍수와 상서로운 징조였다. 대동강에 기름을 넣은 떡을 가라앉혀 물 위에 오색 기운이 뜨게 하고 그것을 상서로운 조짐이라 했다가 들통난 일도 기록에 남아 있다.

1135년

천도가 무산되자 묘청은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군대의 이름은 하늘이 보낸 충의로운 군대라는 뜻이었다.

김부식이 진압군을 이끌고 갔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성을 포위하고 기다렸다.

1년이 넘게 걸렸다. 그 사이 서경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조광이라는 자가 묘청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성은 계속 버텼고, 1136년에야 함락됐다.

1925년

이 사건이 다시 조명된 것은 20세기다.

신채호가 1925년 신문에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는 글을 실었다. 그 사건이 바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다.

그의 논지는 이랬다. 이 싸움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두 흐름의 충돌이었다. 한쪽은 우리 고유의 정신을 이으려는 흐름이고 다른 쪽은 중국을 따르려는 흐름이다. 진취와 보수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묘청이 패함으로써 이후 천 년간 사대적 흐름이 우리 역사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신채호의 해석은 강렬하고 오래 영향을 미쳤다. 다만 오늘날 연구자들은 이 규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묘청 쪽을 자주로, 김부식 쪽을 사대로 나누는 구도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지적이 있다. 양쪽 모두 고려 지배층 내부의 세력이었고, 서경 세력에게도 자기 이익이 있었다. 그리고 묘청이 내세운 근거의 상당 부분이 풍수와 도참이었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신채호가 이 글을 쓴 때가 1925년이라는 점도 함께 보아야 한다.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역사를 쓰던 사람에게, 자주를 주장하다 진 세력의 이야기는 다르게 읽혔을 것이다.

그러니 이 편에는 인물이 둘이다. 1135년의 묘청과, 그를 790년 뒤에 다시 불러낸 신채호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고려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