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 나라를 지킨 역사가는 서류상 없는 사람이었다

1936 2월 21일 · 뤼순 감옥

단재 신채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붓을 들었고, 1908년 독사신론에서 왕조 중심의 역사를 민족 중심의 역사로 다시 쓰자고 선언해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문을 열었다. 1910년 망명한 뒤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정면 비판하며 결별했고, 1923년 의열단의 요청으로 쓴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 직접 혁명"을 외치며 타협 노선과 실력양성론을 통렬히 배격했다. 만년에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해 1928년 동방연맹의 자금을 마련하려 외국환 위조 사건에 연루된 채 타이완 지룽에서 체포됐고 — 독립운동 자금 조달이었으나 죄명은 사기·위조였다 — 10년형을 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하다 1936년 2월 뇌일혈로 옥사했다. 안중근이 순국한 바로 그 감옥이었다. 그런데 그의 지워짐은 죽음 이전에 이미 서류에서 시작돼 있었다. 신채호는 일제의 호적 제도(조선민사령)에 이름 올리기를 끝내 거부했다 — 일본 신민으로 등록되느니 무국적자로 살겠다는 선택이었고, 그 대가로 그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유해가 고향 청주로 돌아왔을 때도 호적이 없어 매장 허가가 나오지 않아 암장하듯 묻어야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정작 대한민국의 호적은 여전히 없었고, 2009년 독립유공자 가족관계등록 창설 특례가 시행되고서야 — 순국 73년 만에 — 그의 이름이 대한민국의 공부(公簿)에 올랐다. 역사를 지키려던 역사가가 두 나라의 서류 어디에도 없는 사람으로 한 세기 가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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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워진 이름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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